작년 겨울에 친구따라 서울갔던 최목수집 큰딸 순아가 돌아왔다. 근무하는 공장에서 휴가를 받아 며칠간 쉬기 위해 내려왔다고 한다. 몇 달 사이에 그녀는 몰라볼 만큼 달라져 보였다.
촌티를 말끔히 벗은 해말간 얼굴에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늘하늘 내비치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여간 세련되고 예뻐보이지 않았다.
이제 며칠간은 온동네가 어수선해 질게 분명하다. 그동안 마음잡고 일하던 처녀들이 이번엔 또 몇 명이나 서울 가겠다고 일손을 놓고 짐을 꾸리게 될까. 서울 간 처녀들이 내려올 때마다 한번씩은 꼭 치러야하는 몸살.
그것은 어쩌면 남모르게 번지는 열병(熱病) 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같은 「열병」을 앓아본 적이 있다. 열여덟살 때였던가.
친구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나버린 마을에서 나혼자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다니며 개간밭의 자갈을 주어야 하고 과수원 구덩이를 파는 일이 죽기보다 지겹고 싫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명절때면 귀향하는 친구들을 대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한아름씩 선물을 사들고 하나같이 깔끔하고 화려하게 성장(盛?)을 하고 공주처럼 나타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이 한없이 부럽고 불같이 시샘이 나고, 그러다가 끝내는 기가 팍 죽어서 방문을 걸어잠근채 며칠이고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쳇, 나도 그늘에서 일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화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면 쟤네들보다 훨씬 이쁠 텐데….
『아부지 예, 지도 서울 가면 안됩니꺼? 돈 많이 벌어 올게 예….』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사정을 해보면 당장 벼락이 떨어졌다.
『이눔아가! 그딴 소린 입 밖에도 내지 마라카이. 계집애가 객지로 나돌며는 망치는기라. 다 니 생각해서 몬가게 하는데 웬 말이 그리 많노?』
완고한 아버지는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다. 며칠씩 밥을 안먹고 떼를 써도 요지부동이셨다.
5월 어느날이었다. 마침내 나는 혼자서 결정을 내렸다. 이 지겨운 농촌을 떠나 서울로 가기로. 까짓것, 못 가게 한다면 내 맘대로 떠나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막상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하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착잡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집을 나와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다.
그날따라 달은 유난히 밝았다. 뒷산 솔숲에는 백로떼들이 가자마다 하얗게 앉아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어 있었고, 멀리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에는 달빛이 자디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한창 탐스럽게 꽃핀 오동나무가 마을을 지키듯 우람하게 서이었다. 마을은 그 꽃향기에 취한 듯 달빛 아래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사과밭으로 내려갔다. 사과밭은 더욱 장관이었다. 눈처럼 하얀꽃이 만발한 사과밭은 전설 속의 화원처럼 신비롭기 까지 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나는 달빛과 꽃과 꽃향기에 취해서 과수원과 마을길을 신들린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이토록 아름다운 고향을 영영 떠나야 하다니!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연 서울생활이 고향을 버릴만큼 가치있는 것일까.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정겹고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 집들만 꽉 들어찬 도시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날밤 나는 싸두었던 보퉁이를 끄르고 말았다. 열병은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음이 즐거우니 고된 일도 힘들지 않았고, 돌하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에도 정이 쏠리고 애착이 갔다.
그해 가을, 오빠가 군에 입대하자 나는 7천평의 과수원을 나혼자 도맡아 관리하기 시작했다. 농민신문을 모아 두었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뒤적여보고 전문가에게 찾아가 자세히 알아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2~3년 후에는 농약치기·열매솎기·수확·저장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74년 9월,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는 3형제 중의 막내로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로부터 밭 한뙈기도 물려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건강과 성실한 성품만 믿고 결혼을 한 것이다.
신접살림을 나온 이튿날부터 우리는 품팔이를 하러 나섰다. 이듬해 모내기를 해주기로 하고 땅을 빌어 보리를 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논을 1년씩 임대하여 벼농사를 짓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우리부부는 한번도 다툰적이 없다. 고되고 짜증이 나더라도 남편의 정이 가득담긴 눈길을 대하면 금방 내가슴은 뿌듯한 기쁨으로 가득차는 것이었다.
어느새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밀린 일 때문에 아이들을 잘 돌보아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커다란 통을 일하는 밭머리에 놓고 물을 가득히 채워 저희들끼리 물장구를 치며 놀게 했다. 손길이 닿으면 닿는만큼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 농사였다.
해가 지고 머슴애가 소모는 소리를 하며 어둠이 깃든 마을쪽으로 날아갈 때쯤이면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하나씩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의 등에 업혀 좋아 어쩔줄 모르면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귀엽고 안쓰러워서 우리부부는 아이들의 볼에 번갈아 뽀뽀를 해주곤 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우리에겐 가장 행복했다. 가난이야 조금 불편한 것일뿐, 행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가을이 되어, 마당가에 곡식 가마니가 쌓이고, 콩이랑 팥이랑 고추?고구마 무더기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가슴 가득히 보람이 넘치고,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79년, 우리는 마침내 2천평짜리 조그만 과수원을 하나 장만하게 되었다. 비록 여러해 동안 버려진채로 잡초만 무성한 폐원일지라도 내 땅, 내 농장을 갖는다는 기쁨은 어디다 비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모래땅의 쓸모없는 과수원을 옥토로 가꾸기 위해 잡초를 뽑아내고, 찰흙을 파 날라다 객토를 하고, 죽은 나무는 캐내고 그 자리에 새 묘목을 심었다.
처녀적에 친정에서 과수원일을 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지도 내가 직접하면서 원하는 나무꼴을 만들고 후북하게 퇴비를 주어 가꾸자 과수원은 제법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셋째 아이를 가지게 되어 단칸방이라도 널찍한 우리집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들어 살고 있던 방은 너무 비좁을 뿐 아니라 애들이 커가면서 주인집 아이들과 싸우는등 속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과수원에 삼간 정도의 집을 우리손으로 지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달밤이면 강변에 나가 시멘트벽돌을 찍고, 집터를 다지고, 기초공사를 했다.
이듬해 봄, 셋째 아이를 안고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집들이를 하던 날은 궁궐같은 저택에 입주하는 백만장자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그해는 시절도 좋았다. 때맞춰 비가 내리고 알맞게 바람이 불어, 들녘에는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과수원에는 탐스럽게 익은 과일들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들녘과 붉은 과일,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푸른하늘이 한폭의 그림만 같던 가을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오후 새참 때쯤이었다. 잘 익은 사과를 골라가며 광주리에 따 담고 있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과 함께 서쪽하늘로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삽시간에 주위가 깜깜해지면서 생전 말로만 들었던 주먹만한 얼음덩이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박이었다.
천지가 암흑이었고 아수라장이었다. 하늘은 하늘대로 온통 찢어지고 깨져나가는 듯 했고, 땅위의 뭇짐승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들은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겨져,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엎드린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피땀흘려 가꾼 농작물들이 단 5분만에 송두리째 박살이 나고 말았다. 김장채소는 넝마 조각처럼 찢기고 과일은 모조리 땅바닥에 떨어진채 어느것 하나 성한게 없이 으깨져 버렸다. 미처 베어내지 못한 벼포기들은 알맹이가 모두 쏟아져내려 볏짚만 앙상했고, 베어 묶어놓은 벼들도 낟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천재가 지나간 들녘은 어디를 보아도 눈물이 났고 어느곳을 가보아도 아수라장이 아닌 곳이 없었다.
『여보, 어쩌지요. 한해 농사를 다 망쳤으니….』
『글쎄….』
남편은 토방에 걸터앉은 채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만 내쉬었다.
과수원을 장만할 때 진 빚도 있는데, 이제 어떻게 한 해를 살아간단 말인가.
부부가 넋을 잃고 마당가에 서 있는데, 해마다 과일을 밭떼기로 사들이던 윤씨라는 상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올해도 여러집의 사과를 선금을 주고 샀다는 윤씨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남편을 보자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 했다.
『홍형, 나는 이제 망했구마. 내돈 3천만원이 5분만에 박살났는기라.』
『아저씨요. 다아 당한 일, 너무 상심하지 마이소.』
내가 그를 위로하자, 윤씨는 내쪽으로 돌아앉으며 손바닥으로 땅을 철썩 철썩 두들기며 한탄을 했다.
『아주머이요, 아주머이네사 금년 농사 안 지은 셈 치더라도 내년이 있잖습니꺼? 그런데 우리사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끌어다 박살을 내버렸으니 볼장 다 본기라요. 땅있는 사람은 무슨 걱정인교? 우박이 땅조차 박살내지는 못하지 않습니껴?』
절망에 빠진 윤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들이 받은 상처따위야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 우박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땅조차 박살내지는 못한다.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거센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도 땅은 절대로 흔들림이 없어장 봄이 오면 다시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고 무성하게 키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것이 아닌가.
우리 부부는 지난 일을 잊고 다시 열심히 살아가기로 했다. 농협에서도 우리가 재기할 수 있도록 융자금 상환을 연기해주고 각종 농자재들을 외상으로 지원해주는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땅은 역시 정직했고 지난 고통을 잊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수확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우리는 논 7백평을 더 장만했다.
이제 집이 있고 논이 있고 과수원이 있으니 남부러운 것이 없다. 그 위에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고, 나를 극진히 아껴주는 남편이 있으니 더 바랄게 무엇이 있으랴.
며칠 전 수박밭을 돌보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데 어떤 새댁이 미역과 김을 가지고 와서 인사하겠다고 해도 부득부득 사달라고 졸랐다.
『돈이 없어서 그래요. 다음에 오세요.』
했더니 과수원도 있고, 수박 농사도 이렇게 잘 지었는데 부자가 이거 하나 못 팔아 주느냐면서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시골에서 살다가 농촌이 싫어서 시집은 서울로 갔는데 얼마전부터 남편이 직장을 잃고 집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버는 돈은 없는데도 하루 세끼 먹어야지예. 집세, 오물세, 수도료, 전기로, 방범비 등은 꼬박꼬박 내야 되지예. 일년도 못됐는데 집세는 올려달라지예, 여러집에 함께 사니께 애들이 남먹는 걸 보고 사달라고, 조르지예…. 참말로 피가 마르는 것 같아예.』
새댁의 신세타령은 한이 없었다.
『서울은 내것 없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어예. 옆집에서 누가 굶어 죽어도 외눈 하나 깜짝 안해예. 그런데 시골 와보니 참 좋네예. 인심 좋고 공기좋고 집집마다 해놓고 사는것도 옛날같지가 않네예. 참 부럽심더.』얘기를 듣고보니 하도 딱해서 김을 한톳 샀다.
남편과 함께 하던 일을 끝내기 위해 수박밭으로 나가면서, 나는 남편의 등을 툭 쳤다.
『당신은 취직 한번 잘 했구마. 평생 해고당할 염려없이 만년사장 아닙니꺼.』
남편은 허허 웃으면서 내 손을 꼭 쥐었다.
『내가 사장이라문 당신은 뭐꼬?』
『내가 만년 부사장 아입니꺼.』
그렇다. 서로 사랑하는 곳. 서로의 아픔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이곳이 나는 좋다. 이곳이야 말로 내행복의 작은 둥지이다.
  [최종편집 : 198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