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인 79년 11월, 나는 20여년간의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철새처럼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나의 생활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뿌리 뽑힌 생활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내 나이도 이제 사십인데, 언제까지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생활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자!)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고향…. 얼마나 정겨운 말인가.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 글썽거리며 떠올렸던 곳인가.
그러나 고향땅에는 누구 하나 우리 4식구를 반겨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반기기는커녕 몹쓸 전염병환자라도 만난것처럼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그때만 해도 근동에서는 소문난 망나니였다. 하고 한 날 술을 퍼마시고, 걸핏하면 아무하고 나 주먹다짐을 하기 일쑤여서 동네 어른들께선 나를 두고 『사람 되기는 벌써 떡 쪄 먹고 시루 엎은 놈』이라면서, 아예 사람 대접조차 안해주던 터였다.
다행히 친척 형님의 주선으로 다 허물어져가는 집 한 채를 구해 4식구가 찬바람을 면하게는 되었지만, 한달도 안되어 당장 끼니를 이어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온마을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무 일이라도 하겠으니 동냥주는 셈치고 보리쌀 한 됫박만 달라고 사정했으나 이 겨울에 무슨 일감이 있겠느냐면서 아예 상대조차 해주려들지 않았다. 아내의 옷고름 속에 꼬깃꼬깃 말아 감춰두었던 비상금까지 바닥이 난지도 사흘이나 되었다. 이제 우리 식구는 꼼짝없이 굶어죽게 될 판이었다.
빈손으로 어둑어둑한 밤길을 싸락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허기져 누워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발길에 밟혀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생각다 못해 그길로 나는 서귀포에서 인장업(印章業)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는 10여년전 군대생활을 할 때 사귀었던 친구인데, 당시 우리는 생사(生死)를 같이하자고 철석같이 약속했었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나의 형편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한차례도 만나지 못했었다.
40리길을 걸어 서귀포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자정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친구는 자다말고 일어나 반가이 맞아주었다.
『이사람아, 이게 꿈인가 생신가. 어쩌면 그동안 소식 한번 없었단 말인가?』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친구는 꽁꽁 언 내손을 와락 거머쥐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 밤중에 웬일인가? 무슨 일이 생긴게로군. 추운데 자, 어서 들어가세.』
『아닐세.』
『친구 좋다는게 뭔가. 말해 보게. 우린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하지 않았었나?』
『여보게….』
끝내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감싸안고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그순간 나는 죽음을 결심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랴 싶었던 것일까.
『여보게. 부탁이 하나 있네.』
나는 울음을 억누르고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든 말해보게.』
『…내 가족을 부탁하네. 자네가 좀 돌봐주게.』
다시 말문을 막으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도망치듯 친구의 집을 뛰쳐나왔다. 친구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뒤쫓아왔다.
친구는 내 바지뒷주머니에 무엇인가를 찔러 넣어주며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길을 정신없이 달려 집에 돌아온 것은 새벽 3시였다.
그때까지 식구들은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기져 퀭한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싸아하게 가슴이 저려오며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그날밤 우리 식구들은 밤새도록 끌어안고 언 몸을 녹이며 울면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았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나왔다. 천원짜리로 스무장, 2만원이었다. 친구가 넣어준 것이었다.
그 돈을 보자 아내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 천대를 받으며 살더라도 차라리 남 모르는 곳에서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여년간 겪어온 떠돌이 생활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남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더라도 여기서 죽자. 이곳이 내 인생의 막장이다.)
나는 친구가 준 돈으로 보리쌀 4말을 팔아 우선 겨울을 넘기고 보기로 했다.
80년 새봄을 맞았다.
겨울동안 나는 달력 뒷장에 「가난벗기 5개년계획서」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첫해인 80년을 『식량자급의 해』로 정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통사정을 하여 밭 5백평을 소작으로 얻어 동냥씨앗에 외상비료로 쌀보리를 파종했다.
해동이 되면서부터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밭에서 살다시피했다.
호미 한 자루가 없어 맨손으로 밭을 매야 했기에 손톱이 찢겨 밤이면 된장을 발라 싸매고 끙끙 앓는 아내의 모습은 애처로워 볼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어 탈곡을 해보니 5백평에서 10가마가 나왔다. 밭주인은 평생동안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많은 수확을 거두기는 처음이라면서 우리 몫으로 7가마나 나눠주었다. 됫박식량으로 이틀 걸러 바닥이 나곤했던 우리집에 보리가 7가마나 쌓이자 부자라도 된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보리뒷그루도 우리는 목화를 심었다. 겨울동안 4식구가 홑이불 하나로 사시나무 떨 듯 하며 밤을 새우다시피했기에 솜이불은 식량에 버금가게 필요했다. 정말이지, 몇끼 굶더라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한잠 자보는 것이 우리 식구 모두의 소원이었다.
80년 여름부터 아내는 해녀들을 따라 바다일을 나가고, 나는 공사판에서 익힌 돌깨는 솜씨를 살려 날품을 팔러 다녔다. 새참이 나오면 내몫은 비닐봉지에 담아두었다가 집으로 가져와 식구들과 나눠 먹으며 끼니를 때웠고 낱담배도 모았다가 팔아서 저축을 했다.
그 결과, 1년간 모은 돈을 모두 셈해보니 54만원이나 되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돈으로 밭 3천평을 빌리고 새끼돼지 한쌍, 리어카 한대를 구입했다.
2차년도 계획의 준비가 완료된 셈이었다.
나는 일감이 없는 겨울동안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길가에 있는 쇠똥이나 말똥, 검불 따위를 닥치는대로 주어모았다. 날마다 우마분과 검불을 한 리어카씩 모으느라 어떤날은 20여리 밖에까지 나간적도 있었다.
우마분과 돼지우리에서 쳐낸 두엄을 함께 쌓고 그 위에 다시 인분을 끼얹은 다음 비닐을 덮고 무거운 돌을 올려 놓으니 한겨울에도 김이 무럭무럭 솟으며 퇴비 썩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3천평의 밭에 50리어카의 완숙퇴비를 넣고 객토까지 하자, 마을 사람들은 평생지어먹을 것도 아닌 남의 땅에 퇴비를 넣고 객토까지 한다며 비웃었지만, 그해 여름 내가 지어놓은 보리농사를 보고는 모두를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워했다.
퇴비야말로 땅의 보약이었다. 첫째로 비싼 비료값을 줄일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밭을 깊게 갈고 퇴비를 3년간 넣으면 병해충은 근접도 하지 못했다. 또한 웬만한 가뭄에도 끄떡없었다.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갈 무렵, 나는 제주도 농민교육원에 들어가 2주일 동안 화훼재배교육을 받았다.
제주도 야산이나 해안에 자생하는 수선화가 서울 강남꽃시장에 출하되면 높은 값에 팔린다는 것을 알고 나는 인공재배를 서둘렀다. 그러나 밭농사가 늘어감에 따라 꽃을 제대로 가꿀 수가 없었다. 분명히 꽃농사는 수지맞는 농사이긴 한데 그렇다고 안정적인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밭농사를 젖혀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수없이 나는 밭농사로 자립기반을 닦을 때까지 꽃농사를 보류하기로 했다. 82년에는 밭을 늘려 6천평을 빌리고 10마력짜리 경운기 한대와 암소 한 마리를 샀다.
기동력이 생기자 작업능률이 몇 곱절 높아졌고 그만큼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퇴비생산목표량을 당초 30t에서 50t으로 늘리고 다시 화훼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83년에는 경작지 1만2천평을 빌려 우리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사꾼이 되었다. 때문에 우리부부는 새벽5시에 밭에 나가면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83년은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보람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그렇게도 소원이던 내 집을 마련했으며, 밭 1천50평과 목야지 7백평을 장만했고, 농협으로부터 시설원예자금을 융자받아 비닐하우스 3백평을 지은 것이다.
그뿐인가. 12월에는 단위농협으로부터 「모범농가상」까지 받게 되었다. 불과 3~4년 전만해도 마을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하던 내가 모범농부로 선정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이게 모두 당신 덕택이오.』
상을 받던 날, 나는 아내의 갈퀴처럼 거칠고 앙상한 손을 쥐고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먹였다.
부부되어 1남1녀를 두고 20여년을 함께 살아 왔지만, 면사포도 못씌워준 아내였다.
『아녜요. 나는 오늘 당신이 이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멋있고 자랑스러워요.』
아내도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꼬옥 마주 쥐었다.
지난해인 84년에는 맥주보리 3백50가마를 출하하여 농협으로부터 「최우수 출하농가상」을 받았다.
사실 띄엄띄엄 떨어진 뙈기밭에서 3백50가마나 수확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로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 부부가 쏟아낼 수 있는 땀방울의 최대치였으며 밤낮이 없던 억척의 결정이었다.
맥주보리 공판을 끝내고 우리 부부는 기진맥진하여 사흘 동안이나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이웃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무리를 했으니 하다못해 약병아리라도 한 마리 고아 먹으라고 권했지만, 판매대금 7백여만원을 한푼도 안건드리고 사채(私債)를 모두 갚아 버렸다.
당장 이발값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백원짜리 면도날을 사가지고 컷트기로 더벅머리를 대강 자른 다음, 4일째부터는 다시 들로 나갔다.
가난 벗기 5개년 계획을 세워 일정표대로 꾸준히 추진해 옴으로써 5년 만에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고 이제는 연소득 6백만원대의 중농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됐다.
물론 그동안에 실패도 많았다. 팬지·페튜니아·샐비어 등 일년생초화류를 하우스 안에서 촉성재배하다가 갑작스런 냉해를 입어 4백~5백만원을 바라보았던 소득목표가 하룻밤 사이에 무산돼버리고 말았는가하면, 고명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던 송아지가 자동차에 치어 죽어 온식구가 밤새 운 적도 있었다.
가난 벗기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냄과 동시에 우리는 이어 「부농되기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지난 5년동안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영농일지를 써왔다. 때문에 언제라도 일지를 펼치면 3년 전의 오늘은 날씨가 어떠했고 무슨 농작업을 어떻게 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다.
이것은 내게 백권의 농업이론서나 기술서적보다 훨씬 훌륭한 스승이 되고 있다. 그때 그때 해줘야 할 일을 미리 미리 계획을 세워 추진할 수 있으므로 농번기에도 갈팡질팡하는 일이 없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한번 잘못된 일을 다시 거듭하게 되지도 않았다.
부농되기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90년의 연간순소득은 2천만원으로 잡고 있다. 남들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계획이 허황된 탁상계획이 아니기 때문이다. 6년전 가방 2개만 덜렁 들고 우리 4식구가 고향을 찾아왔을 때, 어느 누가 오늘의 나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만약 내가 지금까지 도시의 공사판이나 전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면 몰라도 지금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식당 종업원이나 구두닦이가 되었을 것이고, 아내는 행상으로 목이 터져라 외치며 진종일 골목길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극심한 노동과 폭음에 절어 폐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벌써 아침이다. 밤새워 적은 이 수기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아내가 경운기에 시동을 걸어놓고 소리친다.
『여보오. 얼른 나오시우. 5년간 더 노력합니다.』

  [최종편집 : 198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