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첫발을 딛던 79년 9월의 일을 5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 위에 앉아 시골길에 들어서자, 넓은 들에 가득찬 황금빛 벼가 늦여름의 따가운 햇볕아래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슴이 탁 트인다면서 저를 돌아다보았습니다만, 저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고, 무척 착잡한 기분이었습니다. 남편은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흐뭇했었을는지 모르지만 스물아홉에 동안을 대도시 부산과 대구에서만 살아온 저로서는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정말이지, 시골에 들어가 한 사람의 촌부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결혼초부터 남편은 종종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남편은 당시 부산 시내에 있는 선박회사의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에 보수도 시동생 넷을 가르치고 얼마쯤 저축을 할 수 있을만큼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는 며칟날 시골로 이사할테니 준비를 해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남편은 마치 점령군이 통첩을 내리듯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따졌습니다.
『아니, 당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모두들 도시로 못나가서 안달인데, 오히려 시골로 돌아가다니….』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야지.』
『누가 시골에 가서 산댔어요?』
『난 고향으로 돌아가야 돼.』
남편은 완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뜻을 정하고 혼자서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해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갑자기 저는 그런 남편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시골로 들어가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 정년 퇴직을 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그때 들어가도 늦지 않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마. 늙고 힘없을 때 찾아가는게 고향인 줄 알아?』
『그렇다고 편하고 월급많은 직장 놔두고 고되기만 할 뿐, 소득도 변변찮은 농촌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남편은 대꾸를 않고 한동안 담배만 피우고 있었습니다. 한참만에야 그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난 장남이야.』
그 순간 저는 맥이 탁 풀렸습니다. 평생을 탁 트인 농촌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살아오신 부모님을 꽉 막힌 좁은 아파트에 모시기보다는 우리가 고되더라도 부모님 계신 곳으로 가서 사는 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남편의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 뜻을 안 순간 저는 남편의 말에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남이 가정을 이어받을 기둥이라면 맏며느리는 그 장남을 받쳐주는 받침대로서의 운명을 타고 난 게 아니겠느냐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저는 순순히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시골도 사람 사는 곳이다. 또 그곳은 남편의 고향이 아닌가. 남들도 사는데 나라고 못 살 건 없지. 맏며느리로서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점지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했던 게 아닌가.)
그러나 저는 남편과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세 살짜리 큰 애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농촌생활에 기반을 굳히지 못하면 다시 나가 살기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도시의 부모들은 애들이 서너 살만 되면 조기교육이라고 해서 애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해주기 위해 특수학원을 보내는 등 경쟁이라도 하듯 야단들인데, 우리아이는 학원은 고사하고 10여리나 떨어진 학교에 보낼 일이 생각만 해도 애처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선선히 그러마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당분간 저를 무마하기 위해 그렇게 대답했던 것인데 당시의 저로서는 그걸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농촌. 한마디로 기가 막히더군요. 제가 도시에서 먼발치로 보고 느꼈던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있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일하고 겨울 몇 달은 편히 쉬는 줄 알았습니다.
봄에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녘에서 달래랑 냉이를 캐고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는 여름이면 수양버들 늘어진 시원한 냇가에서 수박·참외를 깎아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가을이면 곳간마다 가득찬 햇곡식으로 떡과 술을 빚어 풍년잔치를 열고, 하얀 눈이 창가에 소담스럽게 쌓이는 경우에는 장작불로 따뜻하게 덮인 아랫목에 앉아 군밤 껍질을 벗기면서 못 쓰는 글이나마 끄적거려 보는 멋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코앞에 다가든 농촌은 사철이 따로 없었습니다. 항시 봄이자 여름이었고, 여름이자 가을이었습니다. 들에는 나가지 않아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밥 짓고 빨래하고 새참 거리 장만하고 집안 치우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이었습니다.
도시에서는 밥은 전기밥솥이, 빨래는 세탁기가 해결해주고, 넓지도 않은 집 대강 쓸고 닦고 나면 낮잠을 자든 뜨개질을 하건 멋대로였는데, 농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립문 활짝 열어놓고 마당 쓸고, 부엌 쓸고 안방과 마루를 말끔히 청소하고 나면 몇 안 되는 닭들이 어느새 구석구석 파헤쳐 놓기 일쑤고 바람이라도 한번 불고 지나가면 방과 마루는 뿌옇게 먼지로 뒤덮여, 닦고 또 닦아도 지저분하기만 했습니다. 두 아이는 마당에 내려와 걷고 기어 다니느라 흙투성이가 되기가 일쑤였습니다.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잘 해야 한다는 시부모님 당부대로 인사를 착실히 잘 하다가도 어쩌다 한 분만 빠뜨리면 어느 집 며느리는 좀 배웠다고 거만하더라는 소문이 금방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사람이 아파도 약 한 봉지 사먹을 약국이 없어 밤중에도 10여 리나 떨어진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그 강만 건너면 부산인데도 시내에 한번 다녀오려면 한나절이 꼬박 걸렸습니다.
그런 중에도 제게 기쁨이 있다면 남편이 회사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오토바이를 한대 장만하여 구포까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출근했습니다.
남편은 다달이 월급을 타서 제 손에 쥐어 주었고, 저는 그 월급을 몽땅 대동단위농협에 적금을 부었습니다. 5백만원짜리였습니다. 적금을 부으러 농협에 가는 날은 혼자서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펴보곤 했습니다.
큰애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저축을 한다면 그땐 전보다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남편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반대는 안할 테지. 이사를 가면 두 아이의 방을 아주 멋있게 꾸며줘야지. 거실과 부엌 사이에는 연보라색 커튼을 달고, 식당에는 서구풍의 식탁을 들여놓으리라….
하루하루를 고되게 보내면서도 이방은 이렇게, 저 방은 저렇게 꾸며보겠다는 설계로 힘든 줄을 몰랐는데, 5백만원짜리 적금을 마지막으로 붓던 날, 남편은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세상에…저는 남편으로부터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방 가운데에 무너지는 듯 주저앉았습니다. 앞이 꽉 막혀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앞이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제손을 끌어당기면서 말했습니다.
『농사를 짓겠어. 농촌에서 살 바엔 농사꾼이 되어야지.』
『농촌에서 사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스스로 농부가 되겠다는 거예요? 저나 우리 애들은 어쩌고요. 그럴 수가….』
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되는구나….
그러나 남편은 이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남편은 그동안 농협에 예금했던 돈으로 농기계를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운기를 사서 남의 일을 해주러 다니더니 경운기가 손에 익숙해지다 농협에 트랙터 구입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집안 일만 하던 저를 들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농사일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농촌의 일과가 시작된 것입니다.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무거운 거적을 장대로 걷어 올리고 내리고….
며칠 안가서 제 손바닥에는 물집이 생기고, 밤이면 몸이 파김치처럼 풀어져 등이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혼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일은 해도 해도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고, 수입은 모두 농비로 들어가기 때문에 먹는 것 외에는 한 푼도 저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 놓아도 시세가 없으면 밭에서 고스란히 썩히고 그 썩힌 것들을 치우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품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시세를 맞추기도 하지만 그때는 목돈을 손에 쥐기가 바쁘게 쪼개져 나갔습니다. 그동안 빚진 농자금을 상환하고, 새로운 농비에 투입하고….
그것 뿐이 아닙니다. 겨울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악취와 벌레들의 극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쫓아도 쫓아도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쌓아둔 쓰레기더미에서 나는 악취, 모두 논밭으로 흘러드는 하수도. 「농촌의 향수」라는 거름 냄새는 맡기조차 역겨웠습니다.
2년 동안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여보, 제발 도시로 나가서 삽시다.』
남편은 그러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못 떠나시겠다면 저라도 보내주세요. 전 주산실력이 2단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데가서나 취직해서 두 애들은 가르칠 수가 있어요!』
『뭐라구?』
남편은 갑자기 고함을 버럭 내질렀습니다.
『그래, 나갈 테면 나가라구! 당신 없이도 혼자서 할 수 있어 아무리 여자라구 남편 속을 그렇게 모를 수 있어?』
자연히 저희 둘 사이에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저는 몇 번이고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칠순이 넘으신 친정아버님은 저를 대문 안에도 들여놓으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넌 출가외인이다. 시집 간 여자가 있을 곳은 남편 곁 뿐이어!』
아버님은 저를 대문 밖에 세워놓고 준열히 꾸짖으셨습니다.
『내조라는 것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남편이 흙 묻은 손을 씻을 한 바가지의 물을 떠다 주는 것이 참 내조인 것이다. 남편이 어려울 때일수록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지혜를 아내는 가져야 한다. 그 정도로 참고 견디지 못할 바엔 앞으로도 발걸음도 말아라. 그만한 일로 친정에 오기 예사이니 내가 앞으로 사돈영감을 무슨 낯으로 대하란 말이냐.』
아버님의 말씀은 칼로 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말은 하지 않았어도 농사일을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랐을 뿐이지 농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래도 남의 눈에 벗어나지 않게 농사를 짓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어깨와 팔은 물론 콧잔등까지 허물이 벗어져도 묵묵히 일만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읽었단 말인가. 그동안 나는 농촌의 좋은 면 보다는 애써 나쁜 면만 보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몸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나 여태까지 역겹게만 느껴졌던 농촌이 풍요로운 황금의 들녘으로 돋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농사를 짓고, 봄에는 여름을, 여름에는 가을을 생각하며 단계적으로 작물을 가꿔 나갔습니다. 그는 한 뼘의 땅이라도 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2년동안 재배하던 호박을 3년째에는 딸기와 함께 했고 지난해부터는 딸기만 재배했습니다. 여름에는 수박·파·당근 등을 재배했고 그 결과 작년부터는 조금씩 저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축이 되기 까지는 결코 순조로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잘 가꿔놓은 작물을 병충해 때문에 깡그리 망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몇 줌 더 넣은 비료 때문에 1년간 쌓은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적도 있었습니다.
한여름 뜨거운 폭양 아래서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포트에 흙을 담아 정성들여 키운 모종을 홍수에 떠내려 보내고는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고 하늘이 짓는다』고 할 때에는 남편을 붙들고 큰소리로 울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기술영농만이 농가소득을 높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작물이 한포기만 죽어도 그 원인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기계도 마찬가집니다. 한가할 때는 트랙터와 경운기를 분해하여 요모조모 살펴보고는 성능이 좋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 깨끗이 손을 보아 둡니다.
그런 남편을 볼 때 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할 때 거울 앞에서 멋을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마음속으로 혼자 웃을 때가 많습니다.
작년 겨울, 남편은 올 봄에는 꼭 1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계획이 얼마 보내지 않으면 곧 달성됩니다.
조기교육이다 뭐다해서 고민했던 두 아이의 교육문제도 국민학교에 병설유치원이 생겨 해결됐습니다. 도시에 있는 유치원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겠지만 저는 이 시골에 유치원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먼곳에 있는 학교는 어른들의 걸음으로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두 아이들은 싫다 않고 다닙니다. 이제 아이들의 가슴에도 아빠의 어린 시절처럼 곱고 포근한 추억이 심어져, 장래 시골을 떠나 어떤 사람이 되든, 마음은 항상 고향이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어렸을 때의 일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라 그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부화된 고향의 강물로 되돌아오는 한 마리 연어처럼 고향을 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 친구들의 모임에 가게 되면 친구들은 저의 검게 탄 얼굴과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가만히 웃고 맙니다. 그들이 겪어보지 못한 생활을 목 아프게 얘기해 보았자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할게 뻔합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모임에 갔다온 저녁이면 남편에게 자존심이 상했다느니 뭐니 하며 울고불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저라고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그들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마음도 이젠 거리가 잡혀 친구들의 눈길과 물음을 예사로 받아 넘길 만큼 여유가 생겼을 뿐입니다.
이렇게 농촌에 살면서 바라는 작은 마음이 있다면 애써 가꾼 농작물이 밭에서 썩지 않게 잘 팔리고, 농민들이 농작물을 자기 손으로 시장에 들고 나가 팔지 않아도 될 만큼 농산물의 유통이 원활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처녀·총각들이 애써 도시로 나가 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향인 농촌발전의 밑거름이 되려고 할 게 아니겠습니다.
이제 지나간 몇 년간의 일들을 적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모종도 자신이 살던 곳에서 옮겨 심으면 며칠간의 심한 몸살을 겪은 다음에야 제대로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저도 그런 몸살을 겪었던 가 봅니다.
  [최종편집 : 198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