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자재 만들기 1984 영농수기 당선작
 
 
   
   
   
  농업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살아가는 농민치고 땅 한평쯤 일구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무지 개간-그것은 뼈를 깎는듯한 아픔이 있기에 더욱 그 보람이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10년 전, 대학을 다녔다는 건방진 생각에 빈농의 아들임을 까맣게 잊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동분서주했던 내가 어떻게 개간이란 힘겨운 일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내게 주어진 숙명이 아니었던가 한다.
돌덩이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사나운 가시덩굴만 무성한 45도 경사의 가파른 산을 비지땀으로 개간, 각종 탐스러운 과실들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정녕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힘든 일들을 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10년 전 나는 서울에서 건축업에 실패,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인 전북 정읍(井邑)군 덕천면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체면은 말이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경작하시던 논 1천평과 남의 논 2천 평을 빌어 묵묵히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어려움은 따르게 마련이어서 나라고 예외 일 수는 없었다. 다시 도시로 나가자고 조르는 아내, 농사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 무리한 노동을 감당해낼 수 없는 체력. -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아야한다. 이겨내야한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시금 실패할 수는 없다.) 그러기를 3년. 그동안 모은 얼마간의 돈에 빚 얻은 돈을 합해 처가마을인 이곳 장성군 장성읍 부흥리에 야산 2만평을 마련했다.
77년, 뽕나무 8천그루와 감나무 2천그루를 경운기에 싣고 정읍에서 40km나 떨어진 이곳 마을에 들어섰다.  그때 마을사람들의 조롱은 빗발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파내고 있는 뽕나무를 지금 심다니! 정신이 이상한 사람아녀?』
주위의 비웃음은 간신히 나를 이해하기 시작한 아내마저 의욕을 잃게 했다. 나 역시 이러한 시련을 감당치 못하고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아내와 나는 나란히 산에 올라 가시덤불을 헤치며 괭이 끝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돌밭을 일구었다. 비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하루에도 수십번, 정강이와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은 물집투성이가 되었다. 온몸은 가시에 찔리고 긁혀 상처가 나 아물 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뽕나무를 심는 자리가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일하는 순간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뽕나무는 별다른 기술없이도 몇차례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더니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까지 아내와 함께 사흘이 멀다하고 정읍에서 장성까지 1백리를 기차로 와서 다시 십리나 되는 높고 낮은 험한 산길을 아이들을 업고 다니면서 뽕나무를 보살피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봄, 『상록수』라는 별명을 붙여준 친구들의 도움으로 왜성사과나무 5백여 그루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묘목을 갖다 놓고 밤잠을 설치며 훌륭한 과수원으로 만들기 위한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막상 돌무더기 산과 가시덤불을 또 일굴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친구들의 기대와 호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산을 일구고 또 일궈야만 했다. 물 한동이씩을 들고 산꼭대기까지 3백m를 기어오르면서 사과나무 5백여그루를 다 심었을 때는 그야말로 기진맥진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속에 파묻히다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굴러 넘어졌던 지게질에도 익숙해졌고, 나무 뿌리를 캐내고 구덩이를 파는 데에도 이력이 붙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때면 사과묘목이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도록 해야 했고,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엄동설한에도 구덩이를 팠다. 남들이 모두 잠자는 밤에는 늦도록 잠구(蠶具)를 만들었다.
78년봄, 잘 가꾸어진 뽕나무로 누에 두 상자를 칠 수 있었지만 잠실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궁리끝에 마당 한 구석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 안에서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호사다마(好事多摩) 랄까, 4령(齡) 때 날벼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몰아닥친 폭우로 비닐하우스가 여기저기 줄줄 새어 빗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부부는 잠박을 들고 새어드는 빗물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보았지만 놓을 자리마저 제대로 없었다. 그 순간 보온 못자리용 필름이 생각났다. 허둥지둥 필름을 꺼내 선반 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신히 빗물을 막을 수 있었다.
그해 나는 마을 주민들이 영구(永久) 잠실에서 생산한 누에고치에 비해 손색이 없는 수확을 올림으로써 『비닐하우스에서 어떻게 누에를 기를 수 있을까』하던 마을 사람들의 의문을 뒤엎고 성공적인 모험과 선구자의 감회를 맛볼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영농자금의 일부가 되어 사과나무 5백그루와 단감나무 5백그루, 뽕나무 8천그루를 가꾸는데 사용했다. 자금은 언제나 부족했지만 우리부부의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해나갔다.
나는 매년 산을 더 일구어 사과?자두?복숭아?밤 등을 심기로 하고 그 계획을 착실히 실천하여 6ha의 산에 4천여 그루의 과수를 가꾸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80년봄 어느날, 전남 장성지방에서는 왜성사과가 열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사과대목(臺木)이 무엇이며 어떤 품종인지 조차도 모르고 아무런 지식없이 심은 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이 소문은 아내의 귀에도 들어가 부부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헛소문이기를 바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마음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하루는 『인근 농가에서 왜성사과 50여 그루를 심었는데 6년이 되어도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농가를 찾아갔다.
과연 열매가 달려 있어야할 큰 나무에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왜 사과가 안 열렸어요?』
조심스럽게 과수원 주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4년째 되던해 몇 개가 달리더니 그후로는 전혀 열리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그는 『이곳은 사과의 적지가 아닙니다』하고 자신있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기가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나를 보자 뛰어나왔다.
『정말로 사과가 한개도 안열렸어요?』
『….』
『아니, 어떻게 된거예요. 말을 해야 알잖아요?』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날밤 우리부부는 한숨속에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잠자는 세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니 사과나무가 더욱 원망스러웠고 아내의 말대로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그동안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억울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그 과수원을 찾아가 나무의 자람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잎에 싸여 보이지 않았던 나무줄기에는 벌레먹은 자국이 군데 군데 있었고 그곳에서 수액(樹液)이 흘러내리고, 벌레구멍은 뿌리 속부분까지 뚫려 있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사과가 열리지 않는 이유는 벌레 피해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제는 이곳에서 미래의 꿈을 잃고 왔지만 오늘은 잃어버렸던 내 작은 소망을 되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내는 내말을 듣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우리가 몇 년동안 가꾸어온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사과가 열리기 까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땀은 거짓이 없었다. 우리가 흘린 땀을 자양분으로 하여 사과나무를 잘 자라게 하여 애타게 기다리던 꽃을 몇 개 피워주었다. 평소 강전정을 한탓인지 꽃은 몇 개 안되었지만 그 꽃들은 우리가족 모두의 꿈이며 희망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꽃에 문안하러 갔다. 그 꽃은 며칠을 두고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꽃이 어떻게 하여 열매가 되는지도 모르던 나는 사과가 보이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후 꽃잎은 서서히 져가고, 사과는커녕 꽃대마저 노랗게 시들어 떨어져 버렸다. 설레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며칠을 밥맛도 잃고 방속에 처박혀 누웠다.
그때 아내가 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여보,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원인이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묘목을 줬던 친구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가보면 뭘 해, 이 지방에서는 되지 않는다는걸….』
『그래도 원인은 확실히 알아야 속 시원하게 그만둘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그 친구를 찾았다.
『글쎄, 꽃이 피면 사과는 틀림없이 열리는 법인데….』
친구도 머리만 갸우뚱 거릴뿐 후련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이봐, 기왕해 온 일이니 조급하게 생각말고 1년만 더 기다려보는게 어때.』
돌아서는 나의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친구는 몇 번이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1년만 더 기다려보자.)
나는 이튿날부터 용기를 내어 다시 산에 올랐다. 우리 부부에게 그때 1년은 참으로 길고 지루한 한해였다.
그해는 봄누에 4상자를 치고도 많은 뽕이 남았다. 가을누에 7상자를 치기 위해 뽕밭에 간이잠실을 짓기로 하고 산꼭대기의 경사진 뽕밭에 50여평의 터를 다듬었다. 무더운 여름을 땀으로 녹이면서 바위를 깨내어 잠실터를 다듬었다. 산꼭대기까지 각종 자재를 운반해야했던 아내는 머리가 부어오르도록 무거운 짐을 이어나르는 억순이가 되었다.
(이렇게 비지땀을 흘려야만 먹고사는 것인가.)
땀에 흠뻑 젖어있는 아내의 구멍뚫린 런닝과 까맣게 타버린 얼굴, 거칠어진 손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 참을 수 있는 용기와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우리부부는 지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마다 쏟아지는 오열을 삼키며 이렇게 기도했다.
아내가 힘겹게 들어올려주는 슬레이트 한 장 한 장을 받아 올려가며 지은 잠실속에서 가을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호롱불을 밝혀놓고 무서워 떠는 아내를 위로하며, 아이들의 잠자리까지 이곳에서 같이하면서 열심히 누에를 쳤다. 그해 우리마을에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가지뽕 치기를 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밤을 꼬박새워가며 누에고치를 따고 정성을 다해 선별(選別)을 끝낸 후 공판장에 나갈 때는 마을사람들이 무척 부러워했다.
『야, 거기 모조리 1등아냐, 어떻게 했길래 고치가 이처럼 좋지?』
공판장에서 우리부부의 누에고치가 화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칭찬을 받을 때는 정말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느 검사원이 우리의 고생을 위로해 줄 때는 높게 맞은 등급이 그저 봐준 것처럼 한없이 고마웠고 소처럼 일만하고 살았던 지난 날들이 무척 자랑스럽기만 했다.
사과나무를 심은지 5년째 되는 해인 81년 봄이었다.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많은 꽃들을 피웠다.
얼마후엔 꽃마다 열매가 맺혔다. 잔뜩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던 나는 드디어 환호성을 울렸다.
『여보 당신이 이겼어요.』
『아냐, 모두 당신 덕분이야』
이 열매들은 그동안 우리부부가 흘렸던 한맺힌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었건만 우리부부는 얼싸안고 또 울었다.
그후 사과열매는 날이 갈수록 잘자라 주었고 나는 영농일지에 그때 그때의 자랑을 빠짐없이 기록해 나갔다.
장성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그리고 나의 농장에서도 처음으로 사과를 재배해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사과나무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던 나는 다른 과수농장을 찾아다녔고 교육이 있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의문이 생겼을 때는 관할 농촌지도소 원예담당자에게 상의했고, 나름대로의 실험?실습을 거듭했다.
그해 가을, 많은 수확을 올릴 수는 없었지만 가족과 친척 그리고 따뜻한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첫수확의 기쁨은 돈을 벌게 됐다는 것을 떠나 이웃과 흙에 감사하는 것만으로 우리부부는 만족했다.
6년째인 82년에는 여름전정위주의 결과지(結果枝)를 만들었고 가지유인?순지르기?눈긋기 등 환상박피에 성공, 가시 덩굴로 뒤덮였던 돌산이 황금빛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산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사과가 안된다던 주위사람들은 물론 사과재배에 뜻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과수원으로 찾아와 그야말로 축제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매년 과수원을 늘리고 10여일 간격으로 뿌려야 하는 고독성 농약 때문에 누에치기는 포기해야했다. 미리 뽕나무 사이에 심어놓았던 단감을 잘 가꾸기로 작정하고 이제까지 나의 영농자금을 공급해주던 뽕나무를 모두 파냈다.
82년엔 6년생 사과 5백여그루와 5년생 사과 3백여 그루에서 약 8백여만원의 조수익을 올렸다.
수확할 때 20리터들이 양동이를 두 손에 들고 2천여2016-09-21 상자분의 사과를 모두 아내와 나둘이서 따내렸다.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장화를 신고 오르내렸지만 무릎이 성할때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개간 할 때의 아픔과는 너무나 다른 아픔이었다.
이렇게 따내린 사과는 잘손질하여 광주(光州) 원예협동조합 공판장에 출하, 많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모양과 맛이 뛰어난 장성지방의 새로운 명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부부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그동안 수없이 흘린 땀과 눈물의 보상을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인 탓으로 너무 많은 사과를 딸 욕심으로 제대로 솎아내지를 않았더니 지난해에는 해걸이로 수확이 크게 떨어지는 씁쓸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날의 자본투자에만 급급해온 눈물겨웠던 나날들을 청산하는 『황금의 한해』가 될 것을 기대하며 철저한 영농대책을 마련하여 시비?병충해방제?전정 등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지난날의 영농일지를 참고삼아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우리부부가 개간한 옥토에는 사과나무 2천여그루, 복숭아 4백여그루, 단감 5백여그루, 밤 1천여그루가 있으며 모두 수확기에 들어가 풍성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의 고된 일과를 위로해 주게 되었다. 이밖에도 양봉 20군과 한우 4마리를 기르고 있다. 우리는 빈털터리 영세농에서 개간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올해 나는 수입목표를 약2천만원으로 잡고 있다. 나는 경사가 심해 남에게 소개하기가 부끄러울때도 있지만 내가 심은 모든 나무들이 성목(成木)이 되는 몇 년 후에는 나의 총수입은 약 5천만원은 될 것이다. 왜성사과가 내고장의 새로운 명물로 각광을 받게될 그날을 위해 오늘도 나는 쉬지 않고 나의 젊음을 과수에 바치고 있다.
  [최종편집 : 198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