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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없애고 마을 길 넓히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도시에선 자고 일어나면 건물 하나가 올라간다. 시골이라고 다를까. 더뎌도 변화는 온다.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변화다. 글 지유리 기자 사진 최수연 기자 편집자 주 <전원생활>이 창간 60주년을 맞았다. 전신인 농촌 정보·교양지 <새농민> 시절부터 농촌의 속살과 농민들의 애환을 전달해온 60년 역사를 돌아보며, 전형적인 우리나라 농촌의 원형을 간직한 마을 한 곳을 선정해 3∼12월 10회에 걸쳐 농촌의 변화·발전상을 조명한다. <전원생활>이 선정한 마을은 1966년 농협의 첫 ‘새농민’을 배출한 곳이자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전남 고흥군 금산면 동정마을이다.

사진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노래는 현실을 반영한다. 말장난 같은 동요 노랫말에도 우리네 진짜배기 고향 풍경이 담겨 있다. 거짓이 아닌게 그 옛날, 시골길은 구불구불 궂기도 궂었다. 산길 넘는 건 예사고 굳은살 박이게 하는 진흙밭·자갈밭이 천지였다. 그런 길을 하루에도 대여섯 번 오갔으니 할머니가 꼬부랑대지 않을 수가없었으리라.

그러나 시골길도 이젠 다 옛날 옛적 이야기다. 서울서 출발하면바닷길·산길 넘어 천 리 길을 가야 했던 동정마을까지 지금은자동차로 대여섯 시간이면 닿는다. 소록대교·거금대교 건너 고흥 금진항에서 마을까지 거금일주로가 난 덕이다. 마을 안길도마찬가지다. 동구 밖에서 뒷산 적벽봉까지 뻗은 실핏줄 같던 오솔길이 어느새 어엿한 찻길로 정비됐으니 낙후한 고향집 싫다고 도시로 떠난 이들이 부모·형제 찾아올 적마다 ‘상전벽해’라며 감탄하는 것도 당연하다.세상천지 뒤바뀐 변화는 그저 세월 따라 온 게 아니다. 사람이 없었으면 그 어찌 가능했을?. 먼지 한 톨처럼 작은 변화까지도 지금껏 마을에 살았던 이들이 남긴 발자국이고 손자국이다.

[큰길 따라 경운기 모니 농사일이 힘들까]때는 1976년. 수년 전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이윽고 거금도까지당도했다. 군청은 마을을 가로질러 큰길을 내준다며, 길만 뚫리면 읍내까지 산 넘고 물 건널 필요 없을 거라고 호언했다. 일찍이꿈꿔본 적 없는 이야기라 대개는 귓등으로 흘려들었지만, 선구자 박종안 선생은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 길만 놓인다면야 양파 팔러 장터 가는 길이 곱절뫀 편해질 터. 길이 예정된 자리에있던 ?을 기꺼이 군청에 내놓고야 말았다. 선생은 마을 명운이달렸는데 그깟 밭 몇 마지기가 아까우랴 했지만, 그 속을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군에선 길 놓자고만 허제, 일할 사람은 없었제. 긍께 뭐 한다카면 마을 사람들 죄다 나와분 것이여. 그라고 맨손으로 쎄멘을 비벼서 땅에 바르는 거라. 그때는 길이고 마을 발전이고 알기나 했나. 부역하면 품삯으로 밀가루를 줬거든. 먹고살기 힘들었응께고거이 받을라고 일한 거제.” 앞장서 참여한 김기혁 이장이 길 놓이던 날을 회상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마을엔 일할 청년이 차고 톳쳤다. 이팔청춘 팔팔하니 고생이랄 것은 없고 돈 버는 일이라면 서로 나섰다. 작목반별로 밭 갈듯 부지런히 도로를 치장했으니 그야말로 온 동네가 새마을운동의 주역이었다.

무시로 공사에 나섰어도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걷는 데는 이골이 난 시골 사람이라 길이라면 덮어두고 관심이 없었다. 좋다는 생각이 든 건 며칠 뒤 어느 날이었다.“우리가 맨든 그 길로 경운기가 들어오대. 흙길에서는 어림도 없었제. 농사짓는 데 경운기만큼 효자? 또 없어. 그걸로 농기구 옮기고 수확물 옮기고 허니 인자 그제야 마므 사람들이 고생하길 잘했다고 난리였제.” 김 이장 말마따나 당당히 들어오는 경운기를 목도하고야 동정 사람들은 ‘마을 환경개선’이란 말의 의미를 깨우쳤다. 덕분에 그뒤론 줄줄이 마을에서 뭘 좀 같이하자면 군소리 없이 나선다.기실 시골에선 길이란 게 따로 없다. 이 집 앞마당, 저 집 뒷마당을 길 삼아 다닌다. 그러니 길 하나 내려면 다들 자기 땅을 떼어내놓을 수밖에. 도시에선 땅이 곧 돈이었으나, 동정에선 땅이 곧함께 사는 것이라 여겼다. 함께한 경험이 없었으면 구석구석 마을 안길이 어찌 개간될 수 있었으랴. 동정마을 ?은 사는 이들의양보와 희생으로 포장한 셈이다.“빨래터 대니다 세탁기 돌리니 세상 편해부러”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던 때. 도시에선 세기말이니밀레니엄이니 떠들어대며 세상 무너질까 걱정이었지만 동정에선 느는 빈집이 골치였다. 100가구가 채 되지 않는 마을에 빈집이 스무 채가 넘으니 분위기가 뒤숭숭했다.한때 도道 모범부락으로 꼽힌 걸 자랑삼는 마을이 아니던가. 수년 씩 방치된 집을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다행히 새마을운동 이후로 틈틈이 모아둔 마을기금이 있었다. 마을 환경을 좋게 한다고 마련한 돈이 드디어 쓰일 참이었다. 기금으로 몇몇 폐가를 사서 헐어버리거나 고쳤지만, 문제는 주인과 연락이 닿지않는 집. 군청에서 나오는 폐가 정비사업 지원금 100만원을 받으려면 집주인 도장이 필요했다. 시골 폐가가 그렇듯 멀리 떨어져 사는 주인들은 나 몰라라 하니 헐지도 고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흉물이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오래된 빈집은 지붕만 보면 딱 알아부러. 아직 슬레이트 지붕이라 그러믄 빈집인 거라. 쩌그는 발암물질 나온다 캐서 지금은 못쓰거든. 뵈기 숭해도 주인이 없응께 고치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 거제.” 김 이장은 남아 있는 빈집 대여섯 채를 줄줄 꿰며 말했다.동정마을은 오동나무 동(桐), 우물 정(井) 자를 쓴다. 섬마을임에도 우물이 다섯 군데나 있다. 옛날엔 깊고 맑은 우물이 곧 삶의질을 뜻했다. 식수 길러 먹고 아낙네들 빨래터도 돼주는 곳이니,우물이 곧 마을 세간살이였다.“식구들 밥해 먹일라믄 우물부터 가야제. 물 뜨는 거이부터가 고생이라. 그래도 칠십몇 년도인가, 그때부터 우리 마을 자체 상수도가 생겨부러 사정이 쪼까 나아졌제. 빨래는 우물 말고는 답이없었소.” 마을 토박이 남순열 할머니(84)는 50년도 더 넘은 우물가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우물이 냇가로 흘렀는데 거가 빨래터라. 가불믄 동네 여편네들은 다 모이제. 빨래를 뭐 입으로 허지 손으로 하당가. 손으론 뱅맹이질이나 해구 입으로 수다떨어불제.”최경자 할머니(83)는 몸은 고되도 빨래터 시절이 재밌었노라 말했다.

“무신, 나는 하낫도 안 좋아부러. 시어매·시아부지에 서방·시동생꺼지 뫼시고 살지, 자식도 줄줄이라 하루치 빨랫감이 산더미랑께. 하이고 내 고생 참 마이 했다. 그 시절 생각허니 눈물이 나와부러쏘.” 김판례 할머니(83)가 최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놓으며 눈가를 훔쳤다. “손에 물 마를 날 없던 시절은 말도 꺼내지 말라”며 “부뚜막 고쳐불고 세탁기 놓잉께 지금이 살기 좋제” 한다.동네 좋아지고 덕분에 농사 잘돼 집집이 형편도 폈으니, 그다음은 사는 델 고치는 게 순서다. 1990년대 마을엔 신식 주방을 들 이는 게 유행 아닌 유행이었다. 덕분에 동정마을에선 집집마다사는 데도, 사는 사람도 달랐건만 주방 모양만큼은 ㄱ 자로 똑같았단다.쪼그려 앉아 군불 때던 시대에서 허리 펴고 일하는 부엌의 시대로 들어섰으니, 마침내 아낙네들 삶의 반경이 바뀌었다. 밥하고빨래하는 데 한두 시간이면 족하니 밭으?, 읍내로 일하러 가는이들이 늘었다.

[사람 따라 마을회관도 나이를 먹는다] 마을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는다. 시퍼런 청년이 바글대던 마을에, 해 걸러 상여 나가는 일이 생겨도 이상치가 않다. 죽고 사는일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으니, 동정마을 초상 날은 지금이건 50년 전이건 똑같다. 그날은 아침부터 노인회·청년회·부녀회 등 ‘회會’자 붙은 데는 다 요란을 떤다. 마을회관에 간단하게나마 영결식 제상祭床을 차려야 해 온 데가 떠들썩하다. 한번 이웃하면 일평생 얼굴을 맞대고 사는 마을이라 누군가 먼길 떠나는 날,마을? 밥 한 끼 대접하고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요 앞에 원래 한옥으로 된 마을회관이 있었제. 그걸 헐어베리고양옥으로 다시 지은 거라. 새로 공사하면서 젤로 잘한 거이 창고를 지은 거랑게. 지붕을 쳐놔서 비가 와도 괜찮아부러. 초상 날이면 손님을 치러야 허는디 비 오고 추부믄 할 데가 없는 거라. 회관 새로 지을 때 여를 꼭 만들어달라고 했제.”김 이장은 마을회관에서 가장 좋은 공간이 창고라고 했다. 시멘트로 바닥을 다지고 지붕 올려 하늘만 겨우 가린, 그래서 창고라부르기도 어색한 공간이지만 쓰임새는 더없이 귀하다. 동정 사람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다. 마을회관이 초가집에서 한옥으로, 다시 양옥으로 바뀌면서도 이 공간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마을회관 옆으로 자리 잡은 건강관리실은 2005년에 들어섰다.군에서 얼마간 비용을 지원해준다기에 받아다 세웠다. 번듯하게 하려다 보니 도중 돈이 모자?는데 마을 사람들이 보태 겨우공사를 마쳤다.

“마을에 좋은 일을 헌다는디 울도 좋은 맴으로 내놓은 거제. 갹출한 거이 아이고 기부지, 기부. 나도 그때 형편이 안 좋았어도50만원 내부렀어.” 김 이장이 건물 앞에 있는 기념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지금은 빛바랜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막 신축했을 땐 최신식이라며 인기가 좋았다. 러닝머신을 대여섯 대쯤 갖추고 방 한 칸은찜질방이었으니 자리 차지하겠다며 떼쓰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단했던 건강관리실도 지금은 동네 할머니들 사랑방으로만 쓴다.

“첨에야 인기가 좋았제. 인자는 운동하는 사람이 없어. 마을서는70대면 어린 축이라. 운동하다 여그 쩌그 뿌러지면 클나제. 러닝머신도 다 치워부렀어.”찜질방 불 꺼진 지도 한참이다. 뒷산으로 땔나무하러 갈 사람이없어 화목 보일러를 돌릴 수가 없다. 몇 년 전 바꾼 기름 보일러는 갈수록 사람이 주는 탓에 기름값 대기가 버거워 꺼버렸다. 청춘에서 노년으로 늙어가듯 마을 곳곳도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 지금은 황혼에 접어들었다.마을을 발전시킨 것도 사람, 쇠락하게 둔 것도 사람이다. 그렇다고 마냥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가고 또 오니까. 마을의청춘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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