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용수, 문화공간이 되다…주민들에겐 기쁨 주고, 논밭엔 생명수 주네
입력 : 2023-03-20 00:00
수정 : 2023-03-20 05:01
[농업용수, 문화공간이 되다] 경북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 공원
2010년 마을 관통 농수로 활용 휴식공간 조성
많은 양의 물 연중 흘러…생활용수로도 이용
마을공동체 더욱 돈독해지고 관광객들 호평
경북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에 있는 농업용수를 활용한 농촌공원. 물길에 설치된 수문을 여닫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고령=현진 기자 sajinga@nongmin.com

오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이 많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물을 아껴 쓰고 저장해야 하는 이유다. 평소 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알뜰살뜰 잘 활용하는 마을이 있어 찾았다. 농사에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 적지 않다. 마침 22일은 유엔(UN·국제연합)이 정한 ‘세계 물의 날’이다. 물의 날을 맞아 주변의 농업용수 문화공간을 방문해보면 어떨까.

 

경북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에 가면 아담한 공원이 있다. 규모는 3300㎡(1000평) 정도로 크지 않지만 ‘후암2리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있어 주민들이 오가며 애용하는 곳이다.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공원을 둘러싸고 꽤 많은 양의 물이 연중 흐른다는 점이다. 인근 덕곡저수지에서 흘러온 농업용수다.

물길 중간엔 간이 수문이 설치돼 있다. 직접 도르래를 돌려 수문을 여닫을 수 있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붙어 있곤 한다. 수문 옆에 놓인 돌다리를 겅중겅중 뛰어 건너면 3∼4명이 앉을 수 있는 정자가 설치된 인공 섬이 나온다. 마을회관 건물을 등지고 정자에 앉으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민들의 관절·근육 건강을 책임지는 운동기구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나무다리를 하나 더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다 고개를 숙여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무리 지어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보인다. 돌 사이사이 재첩도 찾아볼 수 있으니 또 다른 볼거리다.

공원을 휘감고 나온 물은 수로옆 작은 고랑으로 흘러 먼 길을 떠난다. 19만8000㎡(6만평) 규모의 논과 4만2000㎡(1만3000평) 크기의 밭을 적실 농업용수로 흘러가는 것이다. 양파·마늘을 재배하는 밭과 딸기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6만6000㎡(2만평)에도 공급된다. 과거엔 40여가구가 이 농업용수 덕분에 작물을 재배하고 생계를 이어갔는데 이젠 농사짓는 주민이 줄어 22가구만 혜택을 본다.

겨울에는 생활용수로도 활용된다. 후암리 농수로는 계절에 상관없이 마를 날이 없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공원에 마련된 공용 빨래터를 많이 찾는다. 집집마다 하나둘씩 간단한 옷가지를 들고 나와 같이 빨래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쌓여 있던 일거리가 어느새 사라져 있다. 덕분에 마을공동체는 더욱 돈독해졌다.

공원이 완성된 건 2010년이다. 당시 마을이장이던 김병환씨(71)가 주도했다. 처음 목표는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김씨는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농수로가 마을을 관통하는 곳이 많지 않다”며 “이렇게 좋은 자원을 그냥 두지 말고 놀거리·볼거리로 만들어 마을의 부가가치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만 모두가 이 공원을 만드는 데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관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고, 오히려 흐르는 물 위를 시멘트로 덮어 길을 넓히는 편이 낫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씨는 “서울 청계천도 숨겨놨던 물길을 열어젖히고 산책로를 만들어서 찾는 이가 많아졌지 않느냐”며 “동네를 관통하는 농수로를 어떻게든 활용해 휴식공간으로 만들자고 설득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막상 농업용수를 이용한 공원이 준공되자 이곳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아침 산책 후 정자에서 쉬다보면 다른 주민들이 속속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운동기구 역시 사용하려면 눈치싸움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1년에 한두번씩 온 동네사람들이 나와 공원 대청소를 하는데 이는 마을의 중요 행사 가운데 하나다. 갈라진 나무벤치를 정비하고 예초기로 풀을 깎으며 보기 좋게 다듬는다. 김씨는 “걸어서 5∼10분만 가면 캠핑장이 있는데 주말엔 거기서 온 관광객이 많다”며 “외지 사람들이 와서 우리 공원을 예쁘다고 칭찬하면 괜히 뿌듯하다”고 밝게 웃었다.

농업용수를 활용해 문화공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멈춰서는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마을 만들기 사업’이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선 사업’ 등을 진행하니 이를 활용해 주민들이 필요한 공원·운동시설 등을 조성하면 된다.

이때 농수로를 최대한 멋진 경관으로 꾸미고 싶다면 한국농어촌공사에 자문해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는 “마을단위로 어떻게 농수로를 개선하고 보완하면 좋을지 논의한 다음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조언했다.

고령=서지민 기자 west@nongmin.com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