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의 전설’ 몰락과 재기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엽전들’의 레코드판(LP)이 재발매됐다. 신중현이 결성한 밴드 ‘엽전들’은 우리 가요 100년사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중현은 1968년 ‘펄시스터즈’ 히트곡 ‘커피 한잔’을 만든 인물로서 이후 김추자·박인수 등을 발굴했지만 1975년 엽전들을 끝으로 활동 금지 조치를 당하면서 전성기를 날려버리고 만다. 그 시절이 그에게 득이었을까, 실이었을까?
신중현은 프로듀서로서 인기 정점에 있던 1972년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노래를 만들라”는 주문을 받았다.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다가 결국 할 수 없이 만든 노래가 바로 밴드 ‘더 맨’이 부른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이후 신중현은 이남이(베이스)·권용남(드럼)과 함께 ‘엽전들’을 결성했다. 당시 한국 가요계는 팝송을 따라 하거나 번안한 곡이 많았다. 신중현은 이번만큼은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엽전들은 1974년 첫 공식 1집 음반을 발표했다. 타이틀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미인’이었다. 1집은 사전에 세차례 비공식 음반이 발매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신중현이 청와대 요청을 거절한 일 탓에 이미 정권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신중현은 1975년 엽전들 2집을 발표하면서 마치 “앞으로 말 잘 듣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이전의 연주들과는 다르게 새롭게 녹음을 마쳤다. 앨범표지 사진을 찍을 때 정권에 부합하는 음악을 하겠다는 의미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다소곳이 촬영했다. 록을 ‘저항 음악’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전세계 록밴드 음반 가운데 이렇게 온순한 자세의 표지는 없으리라.
2집에 ‘아름다운 강산’이 수록됐다. 엽전들의 버전은 더 맨이 부른 것과는 상당히 다른데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감상이 되겠다. 이후 신중현은 1970년대 중반 대마초 사건을 시작으로 활동이 금지된 후 재기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의외의 상황에서 신중현은 다시 급부상했다. 1988년 가수 이선희가 ‘아름다운 강산’을 부른 것이 큰 사랑을 받더니 1990년대 들어 일본인이 그의 음반을 고가에 사들이기 시작한 것. 이어 국내 음악전문가들이 그를 재조명하면서 다시 살아나게 됐다.
정치권 격언 가운데 “권력 근처에 갈수록 감옥과 가까워진다”라는 말이 있다. 인과응보일까? 신중현을 탄압한 인사 대부분이 감옥에 가거나 그 후손이 대가를 치렀다. 신중현은 해금돼 한국 록의 전설이자 대부로서 추앙받고 있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