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듯이 무더운 7월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11쪽)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열린책들)>은 완벽한 소설의 첫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청년이 K다리를 향해 걷는 것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범죄의 길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며, 하숙집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온 것은 궁핍과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상징한다.
평생 가혹한 빚에 시달린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주조된 자유’라고 정의했다. 빚 때문에 자유를 상실한 그는 배가 더 고플까봐 가만히 앉아 책만 읽기도 했고, 빨리 원고료를 받기 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유를 추구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 또한 두번째 아내 안나를 만나면서 ‘주조된 자유’를 찾는다. 돈이 급한 도스토옙스키는 기한 안에 소설 한권을 완성하지 못하면 9년 동안 출간될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넘긴다는 조항이 포함된 계약서에 3000루블을 받고 사인했다.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부랴부랴 채용한 속기사 안나의 도움으로 <노름꾼>을 27일 만에 완성했다.
결국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속기사 아내와 작가인 남편이 탄생시킨 첫 작품이 <죄와 벌>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든든한 조력자를 만난 덕분에 처음으로 퇴고를 거듭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며, 그가 빚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하는 길로 나서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박균호 (북칼럼니스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