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산책] ‘가문 몰락’ 시련 속 성군 보필한 내조의 여왕
신병주의 역사산책 (21)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8)소헌왕후 심씨
시아버지 태종, 왕권 강화 주력
남편 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친정아버지 역모 혐의로 처형
가슴 아픈 가족사 마음에 묻고 어진 성품과 훌륭한 언행으로
후궁들과도 좋은 관계 유지해 세종, 아내의 인품 직접 칭찬
역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년) 심씨는 1395년 9월 청송 심씨 심온(沈溫)과 순흥 안씨의 딸로 경기 양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을 보면 조부 심덕부(沈德符)는 조선 건국 후 회군공신 1등에 책봉됐으며 심온의 동생 심종(沈悰)은 태조의 딸인 경선공주와 혼인하는 등 명문가의 지위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1408년(태종 8년) 14세의 나이로, 두살 연하인 태종의 세번째 아들 충녕대군과 혼인을 한 후,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1418년 6월 왕세자빈이 됐고 두달 후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1418년 11월10일 <세종실록>에서는 “중궁 심씨를 책봉하여 공비(恭妃)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는 관례적으로 살아 있는 왕비에게 ‘공비’처럼 아름다운 칭호를 붙여줬으나, 1432년부터는 왕비에게 또 다른 호칭을 붙이는 제도는 폐지됐다.
하지만 1418년 세종이 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시련이 닥쳐왔다. 상왕인 태종은 왕권 강화에 주력했고, 이 과정에서 친정인 심씨 가문은 크게 화를 입었다. 태종은 심온을 역모 혐의로 처형했고, 심온의 부인과 자식들은 관노비로 삼게 했다. 화의 여파는 왕비인 그녀에게도 미쳤다. 유정현·박은 등은 “그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며 폐비까지 건의했다. 다행히 상왕 태종은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后妃)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면서 소헌왕후가 왕비의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자신이 왕비가 된 순간에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노비 전락은 그녀의 마음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을 것이다. 태종의 조치가 워낙 강경해 남편인 세종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왕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슴속에 울분을 삭이는 일뿐이었다. 그녀가 불교에서 귀의처를 찾은 것도 이러한 가슴 아픈 사연이 큰 동기가 됐을 것이다.
시련 속에서도 소헌왕후는 세종을 잘 내조했다. 1436년 10월 세종은 문종의 두번째 세자빈으로 들어온 순빈 봉씨를 폐하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때 소헌왕후의 덕을 널리 칭송한 기록이 보인다.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家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세종실록> 1436년 10월26일).” 세종은 세자빈을 두번이나 폐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소헌왕후의 내조가 있었기에 이를 극복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2녀를 뒀는데, 세종이 5명의 후궁 사이에서 10남2녀를 생산한 것과 대비해보면 부부 금슬은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의 경우에는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4남4녀를 둔 반면에 9명의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8남13녀를 뒀다. 소헌왕후는 후궁을 투기하는 일이 없었으며, 세종이 총애하는 후궁에 대해서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해줬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왕비의 인품 때문이었을까? 후궁들 역시 그녀의 소생들과 손자까지 양육하는 등 왕비와 후궁이 이례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사례다. 소헌왕후는 개인적인 아픔을 뒤로 하고 세종을 적극 내조했다. 세종 8년에는 세종이 강원 횡성을 간 사이에 화재가 일어나자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해나갔으며, 양로연이나 전별연과 같은 국가행사를 적극 주관하기도 했다. 1446년(세종 28년) 3월24일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왕비의 무덤을 태종의 무덤이 있는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조성했다. 그리고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이곳에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릉으로 모셨다.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합장릉 영릉(英陵)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예종 때에 와서 이곳은 왕릉 터로 부적절한 곳이라 해서 현재의 경기 여주로 옮겨졌고, 여주는 세종의 도시라는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