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산책] ‘킹메이커’ 아내…즉위 직후 토사구팽당하다
입력 : 2019-06-26 00:00
수정 : 2019-06-25 15:58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20)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7)원경왕후 민씨

고려말 명문 ‘여흥 민씨’ 가문의 딸 변방 출신 이방원 잠재력 보고 혼인

조선초 강력한 위세 떨친 정도전

왕자들의 사병·무기 무력화할 때 민씨, 몰래 병장기 갖춰 남편 후원

1·2차 왕자의 난에도 주도적 역할

왕위 오른 태종, 왕권 강화 매진 동지였던 처가 식구 잇따라 처형

후궁 9명 둔 것으로도 크게 갈등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 이방원은 형님인 방과를 왕으로 올리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400년 2차 왕자의 난으로 네번째 형 방간과 박포의 난을 진압한 후 정종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세번째 왕인 태종(재위 1400~1418년)이 됐다. 방원이 즉위하면서 왕비의 자리에 오른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년) 민씨(閔氏)는 남편이 왕이 되는 데 적극적인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원경왕후는 고려말에 부상한 대표적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민제(閔霽)의 딸이었다. 민씨는 1382년(우왕 8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에 2살 연하의 방원과 혼인했으며, 방원은 오랜 기간 처가살이를 했다. 방원은 변방의 시골인 함흥 출신으로, 가문도 크게 내세울 명문가가 아니었다. 다만 민씨 집안에서 방원의 가능성을 알아보았기에 둘은 혼인할 수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민씨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가, 1400년(정종 2년) 2월 남편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돼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그해 11월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돼 정비(靜妃)의 칭호를 받게 됐다.

조선 건국 후 태조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의 정치적 독주 속에 방원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절치부심하고 있던 방원은 방석의 세자 책봉이 이뤄지자, 형제들을 규합하며 정도전과 방석의 제거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정도전 측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혁파와 무기 반납을 추진하며 방원을 압박해나갔다. 정도전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 방원은 사병을 폐하고 무기들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지만, 민씨는 몰래 병장기를 준비해 변고에 대응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훗날 1398년 8월 1차 왕자의 난 때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민씨는 태조 곁에서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의 복통이 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불러내서 정도전을 공격하게 했다. 그녀의 동생인 무구·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하게 한 것이다. 1400년 방간과 박포가 주동이 돼 일어난 2차 왕자의 난 때도 남편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민씨는 당찬 여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종실록>에는 이런 민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 원경왕후는 정치 참여도 봉쇄되고, 태종의 후궁문제로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정도전의 신권 강화 조치에 강한 불만을 가졌던 태종은 즉위 후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외척의 발호를 원천 차단해나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즉위에 최고의 공을 세운 처남인 무구와 무질을 불충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유배에 처했다. 처가를 멸문시키려는 태종의 의도를 눈치챈 민씨는 친정 식구들과 은밀한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처가에 대한 태종의 탄압은 철저했다. 무구와 무질은 자진(自盡)하도록 했으며, 이들의 형제인 무휼과 무회도 역모 혐의로 처형했다. 태종이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9명이나 둔 것 역시 원경왕후와 큰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다. “정비(원경왕후)가 왕이 궁인을 가까이하므로 분개하고 노하여, 가까이한 궁인을 크게 나무라니 왕이 노하여 내치었다”는 문헌기록은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원경왕후는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태종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마음의 울화가 너무 컸던 탓일까? 원경왕후는 1420년 수강궁(壽康宮·훗날의 창경궁 자리)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아들 세종은 당시 경기 광주 대모산 자락에 어머니의 무덤을 조성하고, 헌릉(獻陵)이라 했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56세의 나이로 승하한 태종이 그의 곁으로 왔다.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은 쌍릉의 형식을 취하면서, 사후에는 태종과 원경황후가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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