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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변함없는 자전거포

자전거와 성쇠盛衰를 함께하는 자전거포가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자전거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지킬 자전거포가 있다. 글 강영식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세월을 수리하다

사진 “타이어 좀 봐줘. 오래됐으니 갈아야 쓰겄어.” “어르신, 멀쩡한데요. 괜찮으니 그냥 타세요. 자전거는 타이어가 펑크 나도 자동차처럼 사고 나지 않아요.” 수리해달라는 손님과 안 해도 된다는 자전거포 주인 사이의 대화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위치한 삼천리자전거 부안점을 찾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전거포 주인 김영규(62) 씨는 타는 데 문제가 없으면 손님이 원해떵 수리하지 말라고 손님에게 권한다.

단,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점검해보고 반드시 고치는 데가 있다. 바로 브레이크다.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져서다.

“옛날엔 시골길이 다 흙길이라서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났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 시멘트길이에요. 한 번 넘어지면 무릎 깨지는 것은 약과죠. 어르신이 골반이라도 다쳤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척 심각한 사고예요. 그래서 손님이 수리비를 주든 안 주든 이상 있으면 무조건 고칩니다.” [수십 년 인연 맺은 단골손님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에겐 특별히 관리하는 네댓 명의 손님이 있다. 40년 가까이 자신의 자전거포를 찾아준 단골손님들이다. 자전거가 고장 났다고 연락 오면 그가 직접 실어와 고쳐서 갖다준다. 연세가 많아 손수 자전거포까지 가져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출장비는 받지 않는다. 그러니 돈이 될 리가 없다.

“돈만 보고 어떻게 세상을 살겠습니까. 더구나 그분들은 참 고마운 손님들이에요. 제가 자전거포를 시작할 무렵부터 인연을 맺어온 분도 계시니까요. 그 밖에 웬만한 손님들도 10∼20년씩 제 가게를 다녔어요. 심지어 고등학생 시절부터 들렀다가 결혼해서 아저씨가 돼 자녀 자전거를 사러 오는 손님도 있답니다.” 되돌아보니 어언 40년이었다.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인천체육전문대학(현 인천대학교) 무도학과를 다녔다. 또래들은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웠던 때에 고향을 떠나 유학까지 간 셈이었다. 졸업해서 서류만 제출하면 경찰이나 교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무도학과를 나오면 특별채용됐기 때문이다. 앞날이 보장된 그였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의 권고가 한?했다. “너는 건강하고 깡다구도 있으니 나랑 농사짓자.” 고등학생 땐 유도 선수로, 대학생 땐 레슬링 선수로 뛰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꿈도 농부였기에 서슴없이 부친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형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다. 그 많던 100마지기 논이 빚 때문에 다 넘어갔다. 1981년부터 형과 함께 자전거포에서 일하던 그가 결국 자전거포를 인수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 남은 건 자전거 16대뿐이었다. 집도 넘어가 사글세로 살아야 했고, 가게 전세금도 없어졌다.

“당시에 울?도 많이 울었어요. 거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부잣집 아들이라 망하니 살 수가 없더라고요. 풍족하게 살다가 갑자기 어려워지니 어땠겠습니까. 오죽하면 ‘부안을 떠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까요.” 그렇다고 무일푼인 그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의 자전거포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이 보증 서준 덕분에 300만 원을 대출받았다. 다시 자전거포 문을 열 수 있었다.

“처음엔 수리의 ‘수’ 자도 몰랐어요. 형이 종업원 2명을 뒀는데, 그들한테 기술을 배우며 일했어요. 1∼2년 지나니까 그들보다 나아지더라고요. 그걸 본 친구가 어느 날 그러더군요. ‘인천체대 나와서 자전거포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라고요.” [최고 선물이 자전거였던 호황기] 1980년대는 자전거포 호황기였다. 시골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전거를 탔다. 학생들은 통학용으로, 어른들은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자전거가 일종의 교통수단이었던 셈. 놀러 다니거나 시장에 갈 때도 자전거를 이용했다. 특히 자전거는 ‘최고 선물’이었다. 어린이날 선물로는 물론 초등학교 졸업선물, 중학교 입학선물 등으로 자전거가 인기였다. 그는 졸업식 날 하루에만 ?전거를 10대나 팔기도 했단다. 그리고 자전거 하나를 계속 고치며 타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 부안군 관내에만 자전거포가 66곳에 이를 정도로 성업했다.

“1960∼70년대에는 워낙 비싸서 부잣집에서나 자전거를 탔어요. 자전거 한 대가 쌀 한 가마 값이었거든요.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한 가마 값을 주고 자전거 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요. 그러다 1980년대에 자전거 보급이 크게 늘었죠.” 그가 떠올린 1980년대 초반의 기억 하나. 당시 종업원 월급은 10∼12만 원이었다. 자전거포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우는 종업원은 5만 원. 이렇게 종업원들을 두고 월급을 주면서도 장사가 됐다. 워낙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펑크가 자주 나서 펑크만 때워줘도 월급을 지급하기에 충분했다. 88올림픽이 끝나고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전거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늘면서다. 그래도 1990년대까지는 자전거포를 운영할 만했다. 크게 타격받을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 어서는 자전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사양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10년대에 자전거가 다시 반짝 관심을 받았지만 대세를 돌이키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지금 부안 관내에 남아 있는 자전거포는 고작 두곳에 불과하다.

“요즘 도시에선 레저용으로 주로 자전거를 쓰지요. 하지만 시골에선 어르신이나 초등학생 정도나 탈까요? 아, 귀농귀촌인들이 자주 타긴 해요. 차가 있어도 도시에서 못 느꼈던 즐거움을 자전거로 느낀다는 거죠. 차는 차고 자전거는 자전거라면서요.” 그는 요즘 사람들의 형편이 참 풍요로워졌다고 절감한다.

수백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거나 고치면 충분히 탈 수 있는 자전거를 쉽게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자전거 수명은 10년이라고 본다. 따져?야 1년에 고작 100일 정도나 탈까? 때문에 20년도 사용할 수 있단다. 그래서 쓸 만해도 버려지는 자전거를 보면 낭비가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만 하다.

[수리비 대신 받는 커피 한 잔 ‘보람’] 그래도 자전거포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때가 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의 여성들 덕분이다. “제 자전거에 바람 넣고 기름 쳐주세요. 얼마예요?” 그는 돈을 받지 않는다. 그럼 고맙다며 인사하고 돌아가지만 그날이나 그 다음날에 다시 찾아온단다. “별것 아니지만 음료수 한 병 사 왔어요.” “아저씨, 이 커피 한 잔 드세요.” 그런 여성들을 ‘철든 아가씨’라고 표현하는 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한 우물만 파라.’ 어렸을 적 조부가 그에게 가르친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는 “할아버지가 잘못 가르쳤다”며 웃었다. 물이 안 나오면 옆 구덩이도 파야 하지 않느냐면서. 그래도 여전히 ‘자전거 수리’라는 한 우물을 계속 파고 있는 그다. “아주 예전에 시골에서 돋보기 쓰고 자전거 ‘빵꾸’ 때우는 할아버지를 본 적 있어요. 그땐 ‘나는 저 나이 되기 전에 일을 그만둬야지’ 작정했었지요. 그런데 요즘 보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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