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아이디
비밀번호

  • 정기구독신청
  • 독자투고
sub21

HOME > 과월호보기 >

가을이 온다

김용택 섬진강 시인. 대표 시집으로 <섬진강>, 최신작으로는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가 있다. 호기심이 많아 눈뜨면 잘 때까지 뉴스 보고 영화 보고 책을 본다. 올해 일흔다섯의 노시인이지만 살림 실력도 수준급이다. “그건 아내에게 한번 물어보고”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사진 강길을 거슬러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고추밭을 지나 바람 부는 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지나 내려가면 초등학교가 보이는 이웃 마을이다. 능소화 핀 흙담집을 지나 고샅길을 빠져나가면 마을 앞 느티나무. 다시 강을 건너고 시냇물 하나를 건너서 흐르는 물을 따라 집으로 올 때까지 어느 날은 인적 하나 없다.


초가을의 산책. 벌써 하루해는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산 밑에 새로 지은 집에 노란 불? 켜진다. 산이 눈을 뜨는 것 같다. 배불리 식사를 마친 새들은 벌써 잠잠하다. 집에 돌아와 새들이 잠든 검은 산을 보며 복숭아를 베어 먹는다. 하루가 금방이다.


그 누구도, 다 같은 길이로 하루해 아래 살았다. 저기 저 어두워지는 풀잎도 하루를 꼬박 바람 앞에 서 있었다. 누구의 손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박도 돌담 밑에 자라 넝쿨을 뻗어가다가 하루 해가 넘어가야 하얀 꽃을 피운다. 귀뚜라미들이 우는 풀숲에서 쑥부쟁이가 피어난다. 벼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쑥쑥 팬다. 곧 트랙터가 와 벼들을 털어 담아 가겠지. 참새와 고추잠자리가 한 가닥 전깃줄에 앉아 고민한다. 오이와 가지와 옥수수와 들깨와 고추가 한 밭에서 자란다. 옥수수는 어느새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길게 눕고 참깨는 탈탈 털린다. 고구마는 넝쿨을 멀리 뻗고 파는 푸른 공기를 온몸에 넣어가며 팽팽하게 부푼다.


고구마가 땅속에서 커갈 때 부지런한 손들은 가을을 믿고 배추씨를 땅에 묻는다. 저녁 거미는 거미줄 한쪽 끝을 바람에 날려 저쪽 감나무 가지까지 외줄 타기를 한다. 똥구멍이 없는 하루살이들도 하루를 근면 성실하게 산다. 참새들은 감나무에서 처마까지 빈 빨랫줄처럼 직선으로 난다. 새들이 날아가는 직선에는 두려운 생존의 냄새가 있다.


오래 끌던 더위도 아침저녁으로 문을 닫는다. 풀과 나비들은 햇살의 쇠잔을 안다. 배추 속이 차오른다. 달이 산에 걸렸다. 달빛이 부서지는 여울에서 반가운 감의 얼굴이 나타난다. 아내는 풀잎 끝에 맺힌 별을 찾고 땅은 서리를 부르리라. 끝내 못 찾았던 호박이 돌담 위에서 누렇게 익어가고 무들이 흙을 밀어내며 솟아오른다. 봄비 올 때 바란 농사는 차례차례 이루어졌다. 여름은 지루하였으나 수긍과 긍정의 열매를 주었으니 그 말을 알아들은 가을이 와서 새들을 다 자란 빈 가지로 독립시킨다.


나는, 시를 썼으나, 나무들처럼 제대로 서지 못하였고, 강길을 걸었으나 청개구리 하나 길동무로 사귀지 못하였다. 나는 내 외로움에서 성가신 오해와 괴로움을 털어낸 지 오래되었다. 작은 달팽이들이 한 뼘 길을 건널 때, 한 치 건너 다른 풀잎으로 뛸 수 없는 이슬처럼, 나는 때로 삶의 사실이 두려웠다.


어둠은 뛰지 않는다. 움직임은 세상을 발굴한다. 해 있을 때 나가 해 없을 때 나는 내게 왔다. 가을을 아는 물줄기들은 땅에서 올라온 이슬을 만나 돌 밑에 서리를 치고, 내 등은 시려온다. 돌이 없다면 어둠은 어디? 오고 물고기는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어둠을 밀어내며 달이 강물로 들어서는 시간, 산 아래 물가에서서 나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할까. 나의 하루는 흔들리는 두손 내려놓은 늘, 여기까지였다.
  • 과월호전체보기
  • 목차
  • 기사전문보기서비스
  • 기사전문pdf보기

월별 월간지 선택

OnClick=

과월호전체보기

  • 구독신청하기
  • 온라인구독결재
  • 구매내역확인
  • 편집/배송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