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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팥빙수

시원한 바다로 놀러 가기, 집에서 에어컨 틀고 누워 있기 등 저마다 뜨거운 여름을 즐기는 방법은 다르다. 그러나 남녀노소 공통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빙수! 여름엔 응당 빙수를 먹어줘야 이번 여름도 제대로 즐겼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투박한 옛날 팥빙수를 찾아 부산으로 갔다. 글 서효상 기자 사진 박진주 기자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 마 녹지 마”

가로세로 각각 15㎝ 정도 되는 정육면체 모양의 얼음 한 덩이. 얼음을 파란 기계에 올리고 오른쪽에 달린 손잡이를 돌린다. 서걱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 위로 쏟아지는 얼음 가루. 그 위에팥 한 스푼, 연유 한 바퀴를 두르고 다시 서걱서걱 얼음 가루 한겹. 그 위에 잼 한 스푼, 우유 살짝 부어주고 크게 팥 한 스푼 추가. 마지막으로 알록달록 통조림 과일까지 ?어주면 끝. 그 시절우리가 좋아하던 바로 그 팥빙수 한 그릇 완성이다.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부산 국제시장. 이곳에 약 40여 년 전부터팥빙수와 팥죽을 파는 노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특별한 이름 없이 ‘1번 맛집’ ‘2번 맛집’이라 불리던 이 노점들은 여덟 집으로 불어났고 한 줄로 나란히 서 ‘팥빙수 골목’을 이뤘다. 지금은망고빙수, 인절미빙수 등 각양각색의 빙수가 나오지만, 그 시절엔 빙수 하면 차가운 얼음 가루 위에 연유·잼·팥이 전부인 이 팥빙수가 유일했다.



[옛날에 먹던 그 맛, 부산 팥빙수 골목]
부산 중구 얽창동 국제시장 팥빙수 골목의 배경자 씨(65)는 ‘8번맛집’ 주인이다. 팥빙수 한 그릇에 5000원, 팥죽 한 그릇에 4500원으로 장사를 하는 배씨는 올해로 6년 차. 이 골목에서는 신참이다. 약 45년 전 여기에 처음 자리를 잡은 1번 맛집, 5번 맛집 등은 이제 문을 열지 않는다. 주인 할머니들이 여든 살 가까이 되어계속 일을 하기 힘들어서다. 요즘엔 많이 나와야 네 집, 아니면거의 한두 집만 나온다.


“코로나 이후로 손님이 뚝 끊겼지. 그니까 오래 장사하던 집들도점점 안 나오고.”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지기 전만 해도 이골목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옛날 팥빙수를 추억하는 전국 방방곡곡의 손님들뿐 아니라 부산에 놀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타서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며 발길이 뚝끊겼다. 배씨는 “2년 내내 고생이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장사는 안됐지만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자리를 지켰다.‘어릴 적 엄마 손 잡고 와서 먹던 그 맛’‘여름휴가 때마다 사 먹던 그 맛’이 그리워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순 없어서다. 배씨는 매일 저녁 8시쯤 노점을 접고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내일 쓸 팥을 새로 만든다. 두 되 정도 되는 팥을 4시간 동안 졸이고 식히기를 반복하면 비로소 팥빙수의 핵심 재료인 단팥이 완성된다.“팥빙수는 팥만 좋으면 끝이거든. 젊은 양반이 이 맛을 알랑가 몰라.”수십 년째 이곳에 팥빙수를 먹으러 온다는 동네 어르신이 20대인 기자를 향해 말했다. 통조림 팥에서 느껴지는 인공적인 단맛이 아니라, 구수하고 속 깊은 단맛 아니냐며 반문하자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러고는 “옛날엔 이 얼음 가루에 팥 조금 올리고 빨간 물, 파란물 한 바퀴씩 둘러줬어. 알간?”이라며 말을 잇는다. 빨간 물, 파란 물이 무엇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이, 그런 게 있어”라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팥빙수 그릇을 슥 내민다.“아주머니, 여기 팥 좀만 더 주이소. 아따 맛있네.”

[팥 하나로 ‘백년가게’ 등극한 팥빙수 맛집]
부산에는 국제시장 팥빙수 골목 말고도 팥빙수 핫플레이스가한 곳 더 있다. 부산 남구 용호동에 있는 ‘용호동할매팥빙수단팥죽’이다. 이 가게는 2년 전, 30년 이상 우수한 평점과 후기를 보유한 맛집에 중소벤처기업부가 직접 부여하는 백년가게 인증마크를 받았다.이송자 씨(80)는 1983년 이곳에서 간판 하나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이씨의 남편은 ‘용마상회’라는 이름으로 탁주·얼음·붕어빵 등을 팔고 있었다. 마침 근처에 큰 철강회사가 있었는데,여름이면 뜨거운 용광로에서 일하느라 녹초가 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용마상회에 와 얼음을 사 가곤 했는데, 이씨는 여기서 팥빙수 아이디어를 얻었다. 남편이 얼음 장사를 하고있으니 얼음을 따로 공수하지 않아도 되고, 붕어빵에 넣을 팥도이미 만들고 있었기에 별다른 준비도 필요없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팥빙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점점 인기를 끌었고 이씨 혼자 하던 가게에이씨의 언니들이 합류했다. 그러면서 가게이름을 ‘할매팥빙수’라 붙였고 지금은 ‘용호동할매팥빙수단팥죽’이라는 이름으로이씨의 아들들과 며느리들까지 함께 운영하고 있다.


“팥도 잼도 다 직접 만들어요.”나이가 많은 이송자 씨 대신 전면에 나서가게를 관리하는 며느리 이여진 씨(52)는“겉보기엔 얼음 갈고 재료 턱턱 올리면 끝이니까 쉬워 보이지만안쪽 주방에선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설명했다. 가게외부 주방에선 며느리들과 이송자 씨가 주문을 받고 빙수를 만드는 한편 내부 주방에선 두 아들이 계속해서 팥을 삶고 죽을 끓인다. 이곳의 특제 사과잼은 사과 수확 철에 경남 밀양에서 몇백박스를 사다가 15∼20일 정도 온 가족이 매달려 만든다. 그렇게만든 단팥과 사과잼을 얼음 가루에 올리고 우유를 살짝 부으면 팥빙수가 완성된다.녹기 전에 얼른 먹으라는 재촉에 팥빙수를 한 숟갈 크게 떴다.순식간에 배 속까지 내려가는 차가운 얼음과 달콤한 단팥, 사과잼의 조화가 말없이 두 번째 숟갈을 뜨게 한다. 한 입만 더, 한 입만 더 하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보인다. 이렇게 맛있는 팥빙수가한 그릇에 3500원이라니. 고민 없이 한 그릇을 더 시키고 싶어진다. 며느리 이여진 씨는 “단팥을 좋아하는 어르신들은 두 그릇씩 드신다”며 익숙한 듯 웃는다.오래된 집인 만큼 사연도 많다. 현재 연중무휴인 이 가게는 원래명절에는 쉬었었다. 그런데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오랜만에 친정에 와 어릴 적 자주 먹던 팥빙수를 먹으러 왔는데 왜 문을 닫았느냐”는 전화였다. 성화에 못 이겨 명절에도 문을 열기 시작한 게 올해로 8년째. 가게는 명절 때면 더욱 진풍경이 된다.“명절이면 초등학생 때 엄마 손 잡고 오던 애기들이 커서 자기자식을 데리고 또 와요. 그럼 할머니·엄마·손주까지 3대가 오는거죠. 그런 집들이 아주 많아요.”
이제는 팥빙수 맛집으로 유명해져 전국의 손님들이 다 찾아오지만, 인심은 동네 가게 시절에서 변한 게 없다. 얼음을 좀더 달라거나, 단팥을 좀 더 달라고 손님들이 요청하면 바로바로 한 스푼씩 더 얹어준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준대도 굳이 돈을내겠다는 손님도 있다. 이날도 한 어르신이 “팥이 너무 맛있어서 그래. 천 원어치만더 주쇼” 하고 추가 주문을 했다. 먹던 그릇을주면 그냥 더 얹어준대도 사양하며 “아니 팥을 진짜왕창 먹고 싶어서 그러니까 천 원어치를 따로 퍼주쇼” 한다.며느리 이여진 ?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단골인 듯 보이는 중년남성 한 명이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을 열자마자 “팥빙수 두 그릇 가져가게요” 하는 소리에 이씨가 웃으며 일어난다. 순식간에 팥빙수 두 그릇을 포장한 이씨가 남성에게 팥빙수를 건네며 말한다.“더위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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