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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한 사발

시장이라고 언제까지 전통만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 사발의 추억이 있다. 여름을 시원하게 해줄 그 맛을 찾아 인천 강화도의 시장으로 떠났다. 글 윤나래 기자 사진 박진주 기자, 임승수(사진가)

시원함 가득 담은 여름 먹거리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 못 간다고 전해라~”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풍물시장에 들어서자, 빠른 비트에 흥겨운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2007년 현대화해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난 상설시장 건물에는 17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강화 특산품을 팔고 있다. ‘2’와 ‘7’로 끝나는 날이면 시장 건물 앞으로 오일장이 열려 갖가지 농산물을 가지고 나온 상인들로 빼곡하다.소리만큼이나 존재감이 큰 뽕짝 음반 판매 트럭 앞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다. 노랫말처럼 일단 그냥은 못 간다. 시원한 콩국 한사발 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노부부 옆에 슬쩍 자리를 잡았다.한 그릇에 5000원. 요금은 선불이다. 계좌이체도 된다. 값을 치르자, 12년째 장날마다 이 자리를 지켜온 박상익 사장이 탱글탱글한 우무묵을 소복하게 퍼 담았다. 채 썬 오이 고명을 올리면방금 갈아낸 콩물을 퍼 담을 차례. 어찌나 가득 담는지 귀한 콩국이 넘칠세라 두 손이 먼저 마중 나간다.



[이야기 담아 한 사발, 우뭇가사리 콩국]
“시원~하게 먹게 얼음 좀 더 줘요!”서울에서 시장 구경을 왔다는 손정님 씨(74)의 요청에 박씨는 얼음 삽으로 각 얼음을 푹 퍼서 더 부어준다. “이게 뭐예요?” 후룩후룩 맛있는 소리에 홀려 앉았지만 우뭇가사리가 낯선 이도 있는 모양. 손님의 질문에 “해조예요, 해조”라고 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투명한 젤리처럼 매끈한 이 묵의 원재료는 우뭇가사리라는 홍조류의 해조다. 우무라고도 하고 한천이라고도 하는데, 맛도 투명하다. 즉 무미 무취다. 탄수화물과 섬유질은 풍부하지만,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가 좋다. 차가운 요리와 잘어울려 여름이면 콩국이나 냉채 등에 활용한다. 이 집은 국내산콩과 우뭇가사리에 산에서 길러 온 약수를 쓴다.우뭇가사리 콩국은 남쪽 지역에서 주로 먹던 음식이다.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으로 연식이 좀 된 이라면 어릴 적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우뭇가사리 콩국을 사 먹던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농촌진흥청의 <전통향토음식 용어사전>은 콩국에 우뭇가사리를 말아 먹는 이음식을 전남도와 경남도 지역의 ‘우무콩국’으로 소개하며, 특히 전남에서는‘우무콩물’이라고도 부른다고 덧붙인다. 반면 중부 지역 사람들은 우뭇?사리를 콩국에 넣어 먹지 않는단다. 간장에 각종 양념을 한 소스를 뿌려 비벼 먹는다고.가게 안에 여기저기 대서특필해둔 ‘맛있게 먹는 법’을 살펴보자.소금으로 간한 콩국을 먼저 먹고, 건더기를 남겨 양념장에 비벼먹으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보면 남부식과 중부식의 믹스매치같다. 콩국에 설탕이 빠지면 서운한 전라도 사람을 위해 설탕도갖췄다.“소금을 넣으면 콩국이 고소해지거든요. 그 고소함을 먼저 느끼고, 남은 건더기를 양념장에 비비면 김치가 없어도 느끼하지 않고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과연 콩국에 녹아든 소금의 짠맛이 입에 착착 붙는다. 땀 좀 흘렸다면 이렇게 소금기를 보충해줄 필요가 있다. 젓가락으로 그릇 입구를 바리케이드 치듯 막고 국물만 먼저 마시라고 써 있는데, 와르르 쏟아지듯 밀려드는 우뭇가사리를 한입 가득 들이켜봤다. 부드러운 우무묵은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음식이 맛있고, 재밌다. 왁자지껄한 시장의 분위기가 음식의 흥을 한결 돋워주는 듯하다.얼음을 추가해달라는 기세가 시원시원했던 손정님 씨는 이날장터에서 처음 이 음식을 맛봤다.“우무를 콩국에 말아서는 처음 먹는데 속이 시원해지는 맛이네.삶은 콩이 잘 쉬어 아무 데서나 콩국을 먹으면 탈이 날 수 있어요. 여기는 눈앞에서 콩을 갈아 바로 넣어주니까 맛이 더 좋은 거같아요. 나이 들수록 이런 음식이 더 좋아. 속도 편하고.”

이번에는 강화도가 고향인 아내 따라 시장에 왔다는 박용군 씨(61)의 이야기다.“아내가 화문석이랑 감자를 산다고 해서 따라 나왔는데, 천천히둘러본다고 시원하게 콩국 한 사발 하면서 기다리라데요. 시장올 때마다 종종 이 집에 들르곤 해요. 주로 양념장을 쳐서 먹었는데 오늘은 소금 간만 해서 먹어봤어요. 맛이 더 좋네요.”시장 상인들에게도 콩국은 여름철 사랑받는 주전부리다. 직접기른 농산물을 가지고 왔다는 표시를 앞세운 이들은 천막 아래뜨거운 열기를 콩국으로 한 김 식혀본다.“시장에 달리 시원한 먹거리가 없어요. 장날이면 매번 한 그릇씩은 먹는 것 같아. 콩국이라 든든하긴 한데, 시골 사람들은 배가더 크거든. 이거는 새참이고, 끼니는 아니여. 밥 챙겨 먹고도 출출하니까 한 그릇씩 하는 거지.”

[옛날 기름병에 담긴 요즘 음료들]
강화도 서쪽의 교동도에도 대룡시장이라는 오래된 시장이 있다. 군사지역인 교동도로 가려면 출입증을 군 검문소에 내고 다리를 건너야 한다. 시장 초입에 들어서자 젊은 사람들이 단체로기념사진을 찍는 집을 발견했다. 가게 안에 빈 병이 수북이 쌓여있는 ‘송화칩스’다. 방앗간에서 막 짜낸 기름을 담을 것 같은 유리병들이 눈길을 끄는 이곳은 대룡시장의 ‘핫플’ 중 하나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리마 셋이라는 황금 레시피의 옛날 다방식 커피, 강화도 특산물인 사자발 약쑥을 재료로 한 라테, 젊은이들에게 커피만큼 익숙한 밀크티 등이 이 병에 담겨 나온다. 강화에서만 자생한다는 강화 약쑥은 잎 모양이 사자 발을 닮았다고 해서‘사자발 약쑥’이라 부른다.“어 맞아, 옛날 기름병이네. 커피에서 참기름 맛이 나려나?” “꼭사진 찍고 먹어야 혀?” “그럼요, 이거 먹으려고 한 시간 걸려서 온 건데요” “이거는 무슨 향이지? 진하다.너도 맛봐봐.”가게에 자리 잡은 한 가족이 기름병 음료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길 건너 ‘파머스마켓’에서 만난 한창민송화칩스 대표(45)는 “요새는 다방이 드물잖아요. 제가 강화 출신인데, 어머니가 인삼 장사를 하셨거든요. 그때 따라가서 마셨던 다방 커피 맛을 재현한 거예요. 또 지역 특산물인 사자발 약쑥을 활용한 메뉴도 선보이고 싶었어요. 기름병에 담았더니 추억이 떠오른다며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교동에서 키운 쌀로 만든 달달한 식혜]
대룡시장은 6·25 전쟁 당시 교동도로 온 피란민들이 고향의 장터 모습을 본떠 만든 곳이다. 10여 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시장이지만, 볼거리가 많아 발걸음이 늘어진다. 그 속에서 ‘교동 쌀로 직접 만든 식혜’라는 문구가 어느 어르신의 눈에띄었나 보다. 그는 아이스박스에서 반쯤 녹은 식혜 한 병을 꺼내값을 치르고 만족스레 돌아섰다. 얼음을 아작아작 씹으며 무더위를 녹?는 여름보다 식혜가 달게 느껴지는 계절이 있을까.“교동 쌀은 차지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일교차가 커서작물이 다 맛이 좋아요. 저희는 직접 키운 농산물과 식품을 판매하는데, 농사지은 지는 50년이 넘었고 이 자리에서 판매한 지는30년이 넘었어요. 집안의 어르신들이 빚던 이어받아 찰흑미 식혜도 만들어봤답니다. 시음도 가능하니까 드셔보세요.”‘머르메 애기똥풀네’에서 식혜를 만들어 파는 박선희 씨(39)가함박웃음을 담아 식혜를 건넨다. 멀리 가는 손님에겐 냉동고에서 꽁꽁 언 식혜를 꺼내 준다.



[‘골 때리는’ 짜릿한 맛의 미숫가루 슬러시]
“으아, 이거 존맛탱! 맛있어, 맛있어! 미숫가루 슬러시!” 시장통을 울리는 격한 표현에 이끌려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슬러시 기계 앞. 과연 히트 상품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사인이 붙어 있다. 미숫가루 슬러시 기계가 3대, 단호박 식혜와 분홍색·파란색 슬러시 기계가 1대씩 열심히 돌아가며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유혹한다.미숫가루와 식혜로 슬러시를 만들다니, 이색 조합이 낯설지 않을까? ‘뚱이호떡’에서 8년째 슬러시를 팔고 있는황주용 씨(56)는 이렇게 답했다.“미숫가루 슬러시가 가장 인기가 좋아3대나 돌리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주로 미숫가루 슬러시를, 어르신들은 단호박 식혜 슬러시를 고르더라고요. 아이들은 복숭아나 파파야 슬러시를 더 좋아해요.들고 다니며 먹기 좋아 편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덥다고 그냥 쭉들이켰다가는 머리가 찌릿하고 아프니까요.”사람이 변하고 시장도 변해서일까. 추억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음식도 있지만, 요즘 감각이 더해진 음식들도 눈에 띈다. 옛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새 옷을 입고 만난 오랜 친구처럼 정겹다. 장터를 돌며 한 사발씩 마시다 보니 속이 시원해져 무더위에
도 한결 ? 것 같다. 이 맛에 시장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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