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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막걸리 한 잔

막걸리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음료수다. 한 사발 가득 따라 들이켜면 여행자는 해갈의 기쁨을, 농부는 잠깐의 휴식을 얻는다. 또 막걸리는 회포를 나누는 술자리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면, 행사나 축제에서 흥을 돋우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다재다능한 막걸리는 예나 지금이나 투박한 모습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하고 있다. 글 원용찬 기자 사진 임승수·고승범(사진가)

사발에 담은 사람과 세상 이야기

사진 [여행길에 마주한 반가운 숲속 주막]
항아리에서 막걸리를 퍼 담는 주모, 더위를 식히려 옷섶을 풀어헤치고 막걸리를 들이켜는 나그네.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주막’이라는 그림 속 풍경이다. 말을 묶어두던 역참이나 교통의 요지에 있던 주막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금은 경치 좋은 관광지나 산 아래에서 막걸리를 파는 주점들이 나그네를 부른다.경기 광주시 도척면의 화담숲은 곤지암리조트 안에 조성된 약 5만 평(16만 5265㎡) 규모의 드넓은 숲이다. 백마산의 발리봉과 인접한 이곳은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약 4300여 종의 자생식물로 꾸며져 인기가 좋다. 자작나무숲·진달래길·매화단지 등이명소로 꼽히며, 여름엔 수국 축제까지 열려 문전성시를 이룬다.화담숲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원앙연못 앞에 ‘번지없는 주막’이 있다. 이곳은 현대식 한옥 건물에서 해물파전·도토리묵·순대와 각종 막걸리를 판매하는 ‘숲속 주막’이다.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7월 중순, 형형색색 등산복 차림의중년 남녀들이 주막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온종일 돌아다녔으니 배를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어서 파전들 들고, 잔도 비우고 합시다.”자리에 앉은 이들은 노르스름한사발에 뽀얀 막걸리를 채웠다.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가 번들거리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한 잔 쭉 들이켜는 일행들.“캬! 목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것 같네. 등산엔 역시 막걸리지! 산에 오를 땐 야속했던 비도 주막에서 보니 예뻐 보이지 않아?”일행은 세찬 비에 물방울이 연방 튀기는 연못을 바라보며 잔을채우고 비웠다. 그런데 신선?음하듯 흥겨운 사람들 사이에서홀로 물을 홀짝대며 아쉬운 듯 막걸리 잔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알고 보니 그는 오늘의 운전 담당자. 입맛만 다시며 하릴없이 파전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흥겨운 건배는 한동안 계속됐다.



[예나 지금이나 저녁엔 ‘막걸리 파티’]
예로부터 막걸리는 풍류를 즐길 때 빠질 수 없는 유희의 수단이었다. 선비들의 ‘막걸리 파티’에 대한 내용은 옛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기대승은 벗들과 함께 탁주를 마시며 즐기던 나날들을 시로 옮기기도 했다.금주령이 내려졌을 때도 탁주는 예외라며 밤낮없이 술을 마셨던 옛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막걸리 주점 ‘빠삭족발’에서는 ‘불금’을 맞아 젊은 남녀들이 막걸리를 벗 삼아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막걸리는 이제 나이지긋한 사람들만 즐기는 술이 아니다. 와인보다 저렴하면서 도수가 높지 않아 2030세대에서도 찾는 이들이 많다. 최근에 많은양조장들이 젊은층의 입맛에 맞춘 막걸리를 내놓으면서 막걸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젊은층의 막걸리 파티는 안주부터 잔까지 때깔이 다르다. 찌그?진 사발에 파전은 옛말. 돼지고기 튀김과로제·크림 파스타, 쫄면이 어우러진 모둠 플래터가 안주로 오른다. 주인공인 막걸리도 범상치 않다. 보라색블루베리 막걸리와 크림 꿀 막걸리로, 손님이 주문하면 가게에서 바로 막걸리와 과일을 섞어 만든다고.투명한 병에 담긴 막걸리를 유리잔에 따라놓고 보니그 모습이 예쁜지 막걸리와 함께 셀프 카메라를 찍는소리도 들린다. 술맛에 민감하다는 김채원 씨(26)는 새로 경험한 퓨전 막걸리에 대한 평가도 잊지 않았다.“달콤하고 목 넘김이 깔끔하네요. 과일의 새콤한 맛이강해 부담 없이 먹을 ? 있어 좋아요.”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됐다. 회사에서 선배에게 깨진 얘기부터 결혼을 닦달하는 부모님 이야기까지, 막걸리 한 잔에 2030세대의 애환이 흘러나온다.“그래도 막걸리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니 기분이조금 나아졌어요.”더위가 가시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침 장소를 잘 잡았다며 웃고는 종류를 바꿔가며 이내 몇 병을 비웠다.



[이방인도 빠진 농주와 새참의 매력]
모내기가 끝난 논엔 사람이 간데없고, 수확을 마친 감자밭은 한산하다. 하지만 바로 옆 부추밭은 여름에도 계속 분주?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부추는 4월부터 12월까지 수확해 쉴 틈이 없다. 부추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수확을 신속히 마쳐야 한다.강원 홍천군 남면 유치리와 시동리 일대의 부추농가들은 이렇듯 여름마다 매일 부추를 수확해 출하하며 쳇바퀴를 돈다.“4시면 농협으로 납품해야 해. 후딱 움직여들∼”농장주 원정상 씨(62)가 채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덜덜대는 기계 속에서 품질이 좋은 부추만을 골라
한 단씩 포장하는 일꾼들. 오전 6시부터시작한 작업은 오후 3시까지 이어지고,수백 단의 부추가 트럭에 실렸다. 농협으로 보낸 부추슴 서울의 가락시장으로이동한다.고된 일이 끝난 후의 휴식은 꿀맛이다.


때마침 들려온 새참 소식. 오늘은 잘 삶은 보쌈과 함께 김치가상에 올라왔다. 지역에서 유명한 홍천잣막걸리와 지평막걸리가 잔마다 채워졌다. 삼삼오오 앉은 농부들은 금세 잔을 비운다. 한여름의 작업은 프로 농부에게도 버거운 일인데, 일꾼 중에는 외국인 근로자도 있다.“안토니도 막걸리 해? 한 잔 들어봐.”
원씨의 권유에 필리핀에서 온 안토니 씨가 배를 만지며 속이 안좋다고 몸짓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지켜보다 결국 한 잔 받? 든다. 고기 한 점과 함께 한 모금 들이켜더니 그의 눈빛이 달라진다. 어느새 두잔. 다른 농부들도 잔을 들었다 놨다 하며더위를 식힌다. 농사일의 고단함을 달래는 농주(農酒)로 막걸리만 한 게 있을까.“옛날엔 같은 품삯을 받아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로 일하러 간다고 했지. 안토니는 알랑가?”

[마당극에 대포가 빠질쏘냐]
전북 고창군 성송면에 있는 고창농악전수관은 올여름 매주 금요일마다 특별한 공연을 연다. 고창농악보존회가 주관하는 국악 뮤지컬 ‘이팝 : 소리꽃’으로,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의 성장과정을 농악과 판소리로 풀어낸다. 오후 8시에 열리는 공연 전에는 늘 식전 행사가 진행된다. 바로 마당극에 빠질 수 없는 장
마당 막걸리 판이다.오후 6시부터 공연 직전까지 열리는 장마당 간이주점에서는 해물파전과 두부김치를 판매한다. 고창의 유명 막걸리인 선운산막걸리도 즐길 수 있다.연습을 마친 배우들과 공연 스태프들은
잠시 목을 축이고 무대를 찾아준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한 잔씩 마셨다. 동네주민들도 자리를 채웠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한 사내가 앞에 나섰다.“안녕하세요. 여기 주점에서 파전 부치는 사람입니다. ?사하면서 가볍게 들어보시라고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심청가를 구슬피 부르며 장내를 채웠다. 사람들은 뜻
밖의 공연에 집중하면서 잔을 홀짝였다. 앙코르 요청에 사내는 아리랑 한 구절을 덧붙였다. 한 곡 더 들었으니 해물파전 한 장씩 더 사달라는 너스레를 떨며 퇴장한 그에게 박수가 따랐다. 다음은 고창복지관 소속으로 전수관에서 소고를 배웠다는 노인.“얼쑤!” 하는 관객들의 추임새에 맞춰 춤을 추는 그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함께 어깨를 들썩인다.흥겨운 식전 행사가 끝나고 다소 거나한 얼굴의 사람들이 공연
장으로 들어?다. 막걸리 덕에 관객들의 얼굴에서 기대감과 설렘이 엿보였다. “공연 후에는 장마당 안 해?” 미처 비우지 못한 막걸리 병을 흔들며 묻는 한 관객. 그는“다음 주에 또 오세요”라는 말을 듣고는 객석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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