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아이디
비밀번호

  • 정기구독신청
  • 독자투고

HOME > 과월호보기 >

50여 년 이어온 마크사

학창 시절 교복에 새 명찰을 달 때 뿌듯했던 기분, 주번 마크를 달 때 어깨에 얹혔던 책임감을 기억하시는가. 그리고 그 명찰과 마크를 만들던 곳이 떠오르시는가. 그곳이 요즘엔 사라져버렸겠다 싶겠지만 아니다. 지금도 있다. 글 강영식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실로 새긴 이름 실로 새긴 세월

사진 방범·주차관리 완장, 회장·반장·주번 등의 마크, 해병대 마크와 명찰, 별 세 개짜리 군인 계급장….

경기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의 한일네임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들이다. 가게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운 이것들은 한상식 대표(83)가 직접 만든 견본이다.

“다 미싱으로 누벼서 만들었어요. 저한텐 일종의 샘플이죠. 모두 제 손을 거쳤지만 사실 세세? 부분까진 다 기억을 못해요. 그런데 저렇게 두면 직접 보면서 만들 수 있거든요.” 그가 그렇게 만든 마크 등은 무척 다양했다. 비광 모양의 화투는 갈빗집 주인이 주문했다. 카운터에 놓고 유리로 덮으면 크게 확대한 화투가 된다는 것. 손님에게 ‘돈 많이 버시라’는 기원의 의미로 쓰겠다고 주문했다. 슈퍼맨 마크는 영화 ‘슈퍼맨’이 한창 유행할 때 어느 젊은이가 옷에다 붙이겠다고 주문했고, 다저스(Dodgers) 마크는 예전에 야구 붐이 일었을 때 어느 손님이 등에 달려고 주문했다. 특공무술(特功武術) 마크는 도장에서 주문했는?, 도복 소매에 태극기 마크까지 달아서 갔다.

방범 완장은 예비군들이 훈련할 때 찼다. 동네 곳곳에 초소가 있어서 예비군들이 교대로 총 메고 보초 서거나 완장 차고 순찰도 돌았다. 김신조 같은 무장 공비가 남으로 넘어오던 시절, 그러니까 1970∼80년대 무렵 이야기다. 예비군 훈련이 셌던 그때 그는 완장뿐만 아니라 명찰과 모자에 다는 예비군 마크까지 만들었다. 물론 당시엔 미싱으로 일일이 글자를 새겼다. 요즘에야 실크인쇄로 찍어 나오지만.

[교복 명찰이 알짜배기 일] 뭐니 뭐니 해도 그에게 알짜배기는 학생 관련 일이었?. 교복에 다는 명찰이 대표적이었다. 교복 안쪽에 이름 새기는 게 명찰 만드는 일만큼이나 많았다.

“신학기엔 일이 많이 밀려들었어요. 하루 12시간 작업은 보통이고 밤새우는 날도 있었어요. 손님들이 밀려드는 탓에 점심 식사 거를 때도 잦았고요. 손님들이 기다리는데 어떻게 먹을 수 있겠어요. 신학기가 시작된 후 한 달가량이 1년 중 가장 바쁜 철이었습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신학기 한철에 벌어서 몇 개월 먹고살았다. 1학기에는 동복(冬服), 2학기에는 하복(夏服)을 입던 시절이었으니 가히 가게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1983년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기 전까지 흔했던 풍경이다.

1970년대 당시엔 교복일만 쏟아졌던 게 아니다. 신사복을 맞춰주는 양복점도 많았다. 윗도리 안쪽에 옷 주인의 이름을 새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양복점에서 재단한 옷이 가게로 오면 그가 오버로크(overlock) 친 뒤에야 비로소 신사복 한 벌이 완성됐다. 그뿐만 아니다. 주요 고객 중에는 군인들도 있었다. 휴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새 명찰들을 많이 해 갔다. 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인근에 수원비행장이 있는데 그곳 비행단의 마크 같은 수요가 상당했다. 부대 창설 50주? 기념 마크도 그가 제작했단다.

“마크·문양 등이 다양하다 보니 미싱질에도 여러 기술이 필요해요. 여러 서체를 쓸 줄 알아야 하거든요. 고딕체·명조체는 기본이고요. 양복점에서는 필기체를 선호했어요. 필기체가 부드러운 데다 개성 있어 보이니까요. 영어로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손님이 독특한 주문을 하면 사진을 찍어 오라고 했어요. 그럼 그 사진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죠.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니까요.” [컴퓨터 자수 도입되며 일거리 ‘뚝’] 그는 요즘엔 일감이 크게 줄었다고 한탄했다. 교복 자율화 탓에 교복?이 준 것처럼 기성복이 나오면서 양복일도 줄었다. 양복점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요즘은 부대 내에서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20여 년 전부터 컴퓨터 자수가 도입된 영향이 컸다. 컴퓨터가 대량으로 찍어내다시피 하니 일감이 줄 수밖에 없었다.“10여 년 전엔 수원시 내에만 마크사가 다섯 군데나 있었어요. 그런데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없어지더니 지금은 제 가게만 남았지요.”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일거리가 이어진다. 손님이 해지거나 구멍 난 옷을 가져오면 거기다 꽃 모양을 수놓아서 때워준다. 그럼 감쪽같이 감춰지면서 옷이 멋스럽게 변신한다. 할머니가 모시옷 앞섶에 새를 그려달라면 새 모양을, 나비를 그려달라면 나비 모양을 수놓아준다. 교복일도 가끔있다. 요즘은 교복에 명찰을 달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가끔어떤 손님은 여벌을 가져와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 기숙사에 들어가면 옷이 바뀔까봐 걱정스러워서다. 양로원의 어르신들도 손님이다. 일상복은 물론 속옷까지 들고 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한다. 여럿이 함께 지내니 혹시라도팬티가 다른 사람 것과 바뀐다면 어쩌겠는가. 만약 매직으로 이름을 쓴다? 세탁 후 틀림없이 지워질 터. 하지만 오버로크 치면 아무리 여러 번 빨아도 멀쩡하다. 그의 가게를 찾는 이유다.

“그렇다고 손님들이 예전처럼 북적이지는 않아요. 아주 가끔이에요. 단골손님들도 이젠 거의 돌아가셨고요. 그래서이런 손님이 오면 참 반갑죠. 초등학생 때부터 가게에 다녔는데 결혼해서 자식 두 명을 데리고 명찰 새기러 오는 손님같은 경우 말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직업] 1972년에 개업했으니 어언 50여 년. 1970년대는 참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 역시 배곯지 않으려고 과자공장 배달 등 별일을 ?했다. 사촌형이 운영하는 모자공장에서 일할 때였다. 모자공장에서는 학생모자 등을 만들어 마크사등에 납품했다. 그가 심부름하며 마크사에 드나들었다. 명찰 새기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유심히 보며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것. 마침내 그는 빚을 내서 가게를 차렸다.“그때는 가난하게 살다 보니 길이 별로 없었어요. 이 일로 밥 먹고 살까 싶어서 미싱 하나 들여놓고 가게를 열었어요.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였지만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날까지 하는 직업이 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동안 먹고? 수 있었고, 큰 돈은 벌지 못해도 기복 없이 살았으니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어도 하려는 젊은이가 아예 없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하긴 돈벌이가 되질 않으니 어느 누가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싶다. “요즘은 일이 힘에 부쳐요. 앞으로 몇 년이나 할 수 있을 지…. 이 가게가 없어지면 아마 손님들이 불편할 것 같아요. 구멍 난 옷에 수놓는 것 같은 소소한 일은 컴퓨터가 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제 힘이 닿는 데까지 가게 문을 열 작정입니다.”
  • 과월호전체보기
  • 목차
  • 기사전문보기서비스
  • 기사전문pdf보기

월별 월간지 선택

OnClick=

과월호전체보기

  • 구독신청하기
  • 온라인구독결재
  • 구매내역확인
  • 편집/배송문의

가격안내

구분 요금 비고
창간호 ~ '97.8.30이전 300원(면당) VAT포함
'97.9.1이후 500원(1일치) VAT포함

안내

  • 결제 후 기간 내 모든 월간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결제하신 금액은 반환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