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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버스터미널

시골에는 쇠락하지만 꼭 필요한 공간이 있다. 버스터미널이 그 가운데 한 곳이다.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이지만 주민들을 위해 결코 문을 닫지 않는 곳. 여기 그런 버스터미널이 있다. 글 강영식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어르신 오는 한 열려 있을 문

사진 경북 의성군 금성면의 탑리버스터미널은 늘 을씨년스럽다. 어제 텅 비었던 대합실은 오늘도 여전하고, 승강장에서도 인적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루 6회 대구와 춘산면을 왕복하는 버스가 들를 때만 빼고 그렇다. 아침 8시 3분 출발하는 대구행 첫차에 타는 승객들은 병원 가려는 어르신들 10여 명뿐이다. 다음 10시 23분 버스엔 대여섯 명, 그리고 오후엔 대구에서 돌아오는 어르신들뿐이다.

“다해봐야 하루 스물댓 명이 터미널을 이용해요. 그때 말고는 온종일 대합실과 승강장이 텅텅 비죠. 시골 터미널이 북적이는 모습은 이젠 찾아볼 수 없는 옛일이에요.” 탑리버스터미널 김재도 대표(83)의 말에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1954년부터 터미널을 운영했으니 올해로 67년째에 이른다. 그러니 김 대표는 그 ‘옛일’을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대까지 ‘잘나가던’ 터미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한마디로 ‘잘나가는’ 터미널이었다. 하루 승차권 판매량으로 계산한 승객 수는 1000여 명. 500여 명은 통학하는 중·고등학생, 나머지는 일반 승객이었던 것. 왕복으로 계산하면 2000여 명 수준이었다. 승강장 10곳에 버스가 꽉 들어찰 정도로 붐볐다. 버스노선도 다양해 부산과 울산, 경북 안동·청송 등지까지 이르렀다. 장날에는 더 미어터졌다. 장꾼들까지 외지에서 왔을 정도였으니.

“당시엔 버스 정원이 30명이었어요. 하지만 60명까지도 태웠죠. 버스 차장이 몸으로 승객들을 꾸역꾸역 밀어넣기도 했죠. 그렇게 승객을 버스에 꽉 채우고 다녔어요. 그래야 돈이 됐으니까.” 김 대표가 풀어놓는 그때 그 시절은 술술 이어졌다. 6·25 전쟁 직후인 1951년 대구에서 여객버스회사가 문을 열며 처음으로 버스노선이 생겼단다. 그때엔 운전기사와 기사를 돕는 조수, 차장(여성 안내원)이 한 조를 이뤘다. 전쟁 후라 버스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시동도 스타팅이라는 쇠막대를 엔진에 꽂은 뒤 돌려서 걸었다.

“초창기에는 자갈투성이 비포장도로에다 도중에 큰 재도 많았어요. 버스 성능도 좋지 않았고요. 그래서 새벽 6시 출발하는 첫차가 대구 서문시장에 12시 30분쯤 도착했어요. 1시간 걸리는 요즘에 비하면 정말 느렸죠. 버스 고장떵 잦았어요. 그럼 대구에서 부속을 갖고 와서 고치느라 몇 시간이나 늦어지곤 했지요.” 또 버스에 군용 타이어를 써서 펑크가 자주 났단다. 펑크 때우는 기사를 조수가 돕던 풍경을 김 대표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조수는 운전기사 따라다니며 기술을 배우는 게 목표였어요. 그게 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돈도 얼마 받지 않았지요. 나중에는 그 조수들이 결국 기사를 하더라고요.” [버스서 짐 빠져 벌어지는 실랑이] 대구에서 막차가 6시에 출발하니 당일에 일 마치고 돌아오려면 무척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막?에는 승객들이 항상 많았단다. 사람들이 많으면 별의별 일이 생겨나기 마련. 당시엔 버스 꽁무니에 철근을 대서 짐칸을 마련했다. 대구에서 학교 다니는 자녀나 친지에게 준다고, 승객들은 쌀자루 같은 보따리를 최소 한 개 이상씩 손에 들었다. 60명이 탔다면 짐이 최소 60개인 셈이었다.

그 짐들을 실어 밧줄로 꽁꽁 묶고 출발했다. 중간에 내리는 승객의 짐이 안쪽에 있으면 밧줄 풀고 끄집어내 그 보따리를 찾는 게 큰일이었다. 더 곤혹스러운 경우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다가 보따리가 빠질 때였다.

“터미널에 도착하고서야 짐?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죠. 그럼 승객이 ‘내 보따리 내놔라’ 하며 기사에게 항의하고 기사는 ‘내가 가져갔느냐’고 목소리 높이다가 싸움으로까지 번졌어요. 그뿐인 줄 아세요? 정류장이 아닌데도 ‘내려달라’는 승객과 ‘안 된다’는 기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져 터미널까지 와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소소한 다툼이 잦았어요. 그때 중간에서 화해시키는 게 제 일이기도 했습니다.” 김 대표가 선명히 기억하는 또 한 가지 풍경. 당시에는 부동액이 없었다. 겨울철 터미널에 막차가 도착하면 조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밤새 얼까 봐 라디에이터의 물을 다 뽑아내는 작업이었다. 다음 날 새벽 김 대표의 어머니가 솥에다 물을 끓이면 조수는 그 물을 바가지로 떠다가 라디에이터에 채워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사실 터미널 운영은 김 대표가 고교 1학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타계가 계기였다. 6·25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오니 집은 폭격으로 다 타버렸다. 초가를 새로 지어서 구멍가게를 하다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게 정류장이었다. 그때가 1951년이었다. 당시 정류장을 하려면 기사 등에게 숙소와 음식므 제공해야 했다. 기사 등이 막차로 와서 다음 날 첫차로 출발하려면 필요한 조건이었다. 기사와 조수는 아버지·동생 등과 한 방을, 차장은 어머니·누이와 같은 방을 썼다. 그러다 1954년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갔다.

“제가 가장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거죠. 다행히 승객들이 많아지면서 수지가 맞았어요. 승차권 판매 수수료뿐만 아니라 매점 임대 수입도 짭짤했거든요. 땅 사서 터미널을 새로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터미널 건물은 그렇게 해서 1976년에 지었죠. 한창때는 승차권 판매하는 여직원을 두 명이나 채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농현상과 자동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적자로 돌아섰다. 매점이 문 닫은 지도 오래다. 도우미 아줌마 1명이 차 시간이 되면 와서 승차권을 팔아주지만 수수료만으로는 월급 주기가 턱없이 모자라다. 그래서 자녀들에게서 받은 용돈을 보탤 수밖에 없단다.

[경북도서 ‘노포기업’ 인증] “7년 전 세상을 등진 아내가 생전에 그러더군요. ‘영감, 터미널 치웁시데이.’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러면 어르신들 상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힘들어도 죽을 때까지 계속하자고 했죠.” 정말 그랬다. “터미널 없어지면 눈비 맞고 더위와 추위 피할데 없을 텐데 문 계속 열어줘서 고맙다.” 김 대표는 어르신들의 그 말에 뿌듯한 보람을 느끼며 여태껏 견뎌왔다. 2017년 경북도로부터 ‘노포기업’ 인증을 받은 것도 그런 보람 가운데 하나였다.

1985년부터 5년 넘게 금성농협 조합장을 역임했고, 포도농사까지 지어봐서 누구보다 농촌과 농민을 깊이 이해하는 김 대표. 때문에 앞으로도 탑리버스터미널의 문은 항상 열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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