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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 이어온 도장·시계포

세월이 흘러 사라진 곳이 어디 한둘이랴만, 도장포와 시계포 역시 그렇게 사라져간다. 하지만 꿋꿋하게 세월을 이겨내온 곳이 있다. 바로 신미당이다. 글 강영식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세월을 파고 시간을 수리하다

사진 1971년 문을 연 대전 유성구의 신미당. 도장을 파고 시계를 수리하고 귀금속까지 다루는 가게다. 개업 당시에는 도장포와 시계포를 함께 운영하는 추세였다. 손님들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장 파는 가게에 가면 시계도 수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송석환 신미당 대표(68)도 그 추세를 따랐다. 도장포로 개업한 뒤 이듬해에 시계일을 시작했고, 1973년부터는 금은방도 겸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도장포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쯤그는 별정우체국에 근무했다. 별정우체국이란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정부가 예산 등의 이유로 우체국을 설립하지 못한 읍면 지역의 경우, 개인이 대신 세운 곳을 정부가 우체국으로 인정한 것. 그는 그곳에서 숙식하며 우편물이나 전보 등을 배달했다. 당시에는 전화가 없어서 ‘부친 위독’ 등의 급한 소식은 전보로 전해졌다.

“어느 날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보에 쓰이는 무선통신을 배웠으니 그쪽으로 나가보?고 마음먹었죠. 관련 시험에 합격하면 철도청이나 전화국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무렵 인원이 많아 몇 년 동안 시험을 치르지 않는 거예요.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먹고살려고 연 가게] 가난했던 그라 먹고살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다. 도장에 눈을 돌렸다. 도장 기술만큼은 자신 있었다. 따로 누군가에게서 배운 기술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7∼8세 때부터 도장을 팠다. 산에서 캔 ‘도장나무’(회양목)가 도장 재료였고, 깨진 학교 유리창 조각을 가공한 것이나 쇠우산살을 숫돌에 간 것이 조각칼이었다. 마땅한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 그걸로 도장을 파는 게 그에겐 놀이였다. 우체국에서 일하면서도 숙직실에 책상 놓고 도장을 파서 팔기도 했다. ‘도장 파서라도 먹고살자!’ 은행대출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라 그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새마을금고 전신)에서 3만 5000원을 빌려 가게를 차렸다.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의 나이 17세 때, 친구들은 고교 2학년인 때였다.

도장이 생활필수품이었던 시대였다.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누구에게나 필요했고, 학교입학원서·전출입신고서 같은 서류를 작성할 때는 물론 통장을 개설할 때도 ?요했다.

“도장을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선물로 학생들에게 주던 때였지요. 대덕군이 대전시로 편입되기 전이었는데, 당시 군 전체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3000개를 주문받았거든요. 기일에 맞춰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15일 동안 잠 한숨 안 자고 일했습니다. 그때 ‘아나뽕’이라고 잠 안 오는 약이 있었어요. 박카스에다 아나뽕 한 알을 먹으면 밤새 정신이 말똥말똥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학교 졸업시즌이 대목이었지만 손님들은 수시로 왔다. 면사무소 공무원도 자주 드나들면서 한 달에 수백 개씩 목도장을 주문했다. 지금 ?돌아보면 남의 이름으로 위조 도장을 만들어 ‘비리’에 쓰지 않았나 짐작된단다. 그 시절엔 위조 도장으로 위조 서류를 만들어 주변 공유지 등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경우 등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도장 서체를 다 다르게 새기는 그의 솜씨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제가 초등학생 시절에 선생님 도장을 위조(?)한 적도 있어요. 왜, 숙제를 내면 선생님이 ‘검’ 자 도장을 찍어줬잖아요. 그 도장을 제가 똑같이 팠어요. 그럼 숙제를 못한 친구들이 그 도장을 쓰고, 보상으로 저는 누룽지를 얻어먹었거든요.” [날인이 서명으로 바뀌며 도장 줄어] 그에 따르면 도장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전후쯤부터 였다. 날인이 서명으로 바뀌면서 도장 쓸 일이 적어졌다. 통장도 서명으로 개설이 가능해지니 도장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와의 인연을 잊지 못해 지금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20여 년 전에 도장을 파 간 손님인데 손주가 태어났다며, 얼마 전 그에게 손주 도장을 주문했단다. 한 개당 20만∼30만 원짜리 도장인데도 비싸다고 하지 않고 말이다.

사실 그의 도장은 그럴 만하다. 그만의 서체를 개발한 데다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을 도장 재료로 쓴다. 도장을 넣고 빼기가 부드럽도록 안에 스프링을 넣은 도장 뚜껑은 실용신안특허를 받았다. 디자인은 의장특허까지 획득했으니 가히 고급스런 도장이라 하겠다.

“처음엔 학원에서 시계 수리 기술을 배웠어요. 그 시절엔 시계 수리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거든요. 두 달 정도 다니다 보니 더 이상 배울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밤 새워가며 연습했어요.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빈혈로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기술을 습득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년 전 서울 종로에서 손목시계 방수처리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를 만났다. 그는 그 기술자에게 당시 돈으로 30만 원어치 술을 샀다. 방수처리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 기술자에게서 배운 기술은 술값의 몇십 배 가치를 했단다.

시계 판매와 수리가 무척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손목시계는 누구나 다 찼고, 당시 값진 선물도 시계였다. 결혼 예물도 손목시계였고, 괘종시계는 액자나 거울보다 더 큰 선물이었다. 오죽하면 ‘시계계’까지 유행했을까. 함께 돈을 모아 시계를 하나씩 사는 계였다. 한마디로 시계가 생활필수품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자시계가 나오면서 시계포가 하향길에 접어들었다.

시간을 맞추거나 고칠 필요가 없으니 당연했다. 문방구점에서도 시계를 팔 정도였으니 시계포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요즘 대전 시내에서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이가 10명도 채 안 된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액세서리로 거듭난 시계] “그런데 요즘은 시계가 늘어나는 추세예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요. 시계를 일종의 액세서리로 여기더군요. 옷이나 가방처럼 패션의 일부로 사용하는 거죠.” 그가 만난 어느 손님은 시계를 10개 넘게 갖고 있기도 했다. 그때그때마다 옷에 어울리는 시계를 찬다는 것. 시계 수집이 취미인 손님도 있단다. 시계들을 차지 않고 집 안에 고이 모셔두는 경우다. 가끔 건전지를 갈러 와서 “시계가 죽어 있으면 내가 죽은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골동품 같은 옛날 시계를 고치러 오는 손님도 있다. 그런데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은 시계가 꽤 된다. 그걸 다 모은 게 라면 상자로 여럿이다.

“맡긴 사실을 잊었다가 1년 만에 찾으러 오는 분들도 가끔 계세요. 이민 갔다 온 어떤 손님은 몇 년 만에 방문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손님이 3개월 이내에 찾으러 오지 않으면 보통 돌아가신걸로 여겨요. 안 찾아가도 손님이 맡긴 시계인데 버릴 수가 있나요. 제가 살아 있는 한 보관하고 있을 작정입니다.”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가게 운영은 걱정 없다는 송 대표. “가게 덕분에 한평생 먹고살 수 있어서 행복하고 고맙다”는 그다.

그래서 신미당의 문은 앞으로도 늘 열려 있을 것이다. 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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